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오늘은 '노약자석'에 얽힌 지하철에서 경험한 일을 써보려 한다.
우선 일화를 말하기 전 단어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ㅇ 노약자는 한자어로 ‘늙을 로(老)’와 ‘약할 약(弱)’이 합쳐진 단어로,
나이가 많거나 신체적으로 약한 사람을 뜻한다.
즉, 이동에 어려움을 겪는 고령자, 장애인, 임산부 등의 사람을 말한다.
몇 년 전, 계단을 내려가다 넘어지면서
발바닥 뼈가 부러져 몇 개월을 깁스와 목발에
의지했던 때의 일이다.
복잡한 출퇴근 지하철 속에서 도저히 서있기가 어려워
'노약자석'을 이용하며 출퇴근을 했었다.
하루는 퇴근길에 노약자석을 이용하고 있던 나에게
한 아주머니가 나의 팔을 툭 치고는
지나가던 어떤 할아버지를 이끌고 와서는 말했다.
'젊은 여자가 여기를 이용하는 게 맞아요?
노약자석이니 지나가는 할아버지가 앉을 수 있게
자리에서 양보하세요'
완전히 틀린 얘기는 아니었지만
무례함으로 비롯된 당황스러움과 동시에
'여기는 진짜 노인들만 앉는 곳인가?'라는 의문으로
긴치마 속에 가려진 깁스된 다리를 아주머니께 보여드렸다.
그러면서도 앞에 서계신 할아버지를 보니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죄책감에
동동구림은 어쩔 수 없었다.
할아버지께서는
'아가씨가 다리가 아픈 것 같은데 괜찮다'하시며
다른 칸으로 가셨고,
난.. 괜히 불편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도착지까지 앉아갔다.
그 이후 왠지 주변에 설명을 해야 할 것 같은
마음졸임이라는 새로운 눈치를 장착한 채
일부러 깁스한 다리를 더욱 티내며 잠자는척 이용하며 깁스와 작별했다.
(물론 일반석에 자리가 많은 때는 논외다.)
또 이건 다른 경험이다.
한 젊은 여성분이 노약자석에 앉아 있었고,
함께 앉아 있던 할머니가 대뜸 허공의 주변을 향해
'요즘 젊은 사람들은 참 문제야 문제.
젊은 사람이 왜 이 자리에 앉아있나 몰라'를 외치며
주변의 공감을 일으키기 위해 젊은 여성분을 당황케 하는 말을 스스럼없이 하셨다.
그 이야기를 들은 한 젊은 커플 중 여자가 자신의 남자친구에게
'저 여자도 앉아 있는데 나도 저기 앉을래'를 말하며
그 역시 앉아 있는 여성분을 당황케 하는 말을 스스럼없이 했다.
나역시 '왜 앉아 있는 거지? 임산부인가?
아님 전날 과음으로 너무 힘이 드신건가?'를 생각하며 힐끗 쳐다보았다.
그러다 전철에서 내리는 그 분의 모습을 보고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 분은 겉은 의문을 살 수 있는 아무렇지 않은
젊은 여성으로 보였지만 몸이 불편한 분(다리가)이 었던거다..
뒤늦게 커플 중 남자가 자신의 여자 친구를 다그치며
그분께 묵례로 사과를 드렸고, 나 역시 겉으로만
사람을 판단한 나의 편협한 시야에 아차 싶었다.
그렇다.
사실 '장애'라는 것은 겉으로 확연히 티가 나기도 하지만,
그 사람의 움직임 등 관찰을 통해 알 수 있는 다양한 경우가 존재한다.
그런데 나를 포함해 무지한 간혹의 사람들은
우선 보이는 것으로 사람을 판단해서
의도와는 상관없이 시선,말,행동으로 상처를 주기도 한다.
비슷한 사례로 '우울증'을 겪는 사람들은
외관으로 티가 잘 나지 않는 경우가 있어서
주변에서 '네가 우울증이라고? 나도 하루하루가 우울해' 등의 농담 섞인 반응을 하다 뒤늦게 '진짜였구나'를 알게 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장애에 한정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약자'의 개념에서 보더라도
겉으로 단번에 알아채기 어려운 일들은 비일비재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서로 본의 아닌 상처를
주기도 받기도 하게 되는 경험을 한다.
또 한편으로는 나의 경험 속 아주머니와 같이
누군가에게 대단한 도움을 주기 위한 적극적 행동이
다른 상대에겐 무례함과 상처로 다가올 수 있다.
그래서 도움을 준다는 것,
어떤 말을 하고 생각한다는 것 등은
새삼스레 나름의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일종의 눈치가 필요한 부분인 것 같다.
이 글을 통해 읽는이로 하여금
다양한 일상 속에서 자신의 시선, 말, 행동에
어떤 의도의 유무와 상관없이 조금은 주의를 기울여
폭넓은 사고를 가질 수 있는 기회의 창구가 되길 바란다.
우리 모두는 불완전하고, 주어진 상황 모든 것은 변하기에
나 또한 그런 시선과 입장이 되지 마란 법은 없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