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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 Apr 20. 2023

더 글로리

(위로라는 이름의 폭력, 그 얄팍함에 대하여)

더 글로리

(위로라는 명목의 폭력, 그 얄팍함에 대하여)


사공이 많으면 산으로 간다더니..,


가해자를 위한 응징만이 피해자를 위한 영원한 보상이 될 수 있을 까? 응징을 끝낸 피해자는 이후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까? 이 드라마는 응징만이 유일한 답이고 그 이후 피해자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지에 대한  어떤 고찰도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복수를 끝낸 문동은이 갑자기 다른 누군가의 복수를 위해 자결을 포기하고, 다시 누군가의 응징을 돕는다.  피해자들의 연대를 통해 서로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간다는 의도 자체는 좋은데, 그 방법이 오직 응징 뿐만이라는 건 이 드라마가 권선징악이라는 얄팍한 상술로 만들어졌다는 증거이다.


증오라는 감정은 마치 사랑과도 같아서 증오하는 사람을 계속 생각하게 된다. 어쩌면 사랑보다 더 강렬한게 복수일지도 모른다. 한 사람에 대한 증오가 가득해지면, 내 세상은 그 사람으로 가득채워지기 마련이다. 내가 겪은 고통을 그사람도 똑같이 겪었으면 좋겠다.


"니 세상이 온통 나였으면 좋겠어 연진아"


극 중 내내 연진에게 말하듯 이어지는 동은의 독백은 이 드라마에서 감탄할 만한 표현방식이다. 누군가의 생각 없는 행위로 인해 한 사람의 인생이 그 누군가를 향한 증오로 채워질 수 있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복수라는 감정은 나의 선한 마음 조차 삼켜버려 한 사람을 향한 증오로 가득채운다.  검은색 바둑알이 흰색 바둑알을 삼키듯, 그 감정은 서서히 자신의 마음을 잠식시키기 마련이다. 복수란 나의 마음속 흰 바둑알은 흑색의 바둑알로 서서히 변색시키는 과정이다. 동은의 마음 속의 바둑은 그렇게 시작되고 서서히 자신 마음 속에 있던 선이라는 감정을 잠식시켜 갔으리라 생각한다.


"내 19살은 거기서 끝났어"


너무 나도 어린 나이에 형언할 수 없는 일을 당했던 동은의 삶은 거기서 멈춰버렸다. 이미 가해자를 향한 복수심에 모든 가능성이 막혀버렸다. 조용히 그림을 그리던 소녀가 그 순간에 사라졌다. 하지만 가해자의 삶은 그대로 흘러간다. 누군가의 시간은 그곳에 멈춰 있지만 다른 누군가의 시간은 마치 아무일 없다는 듯 흘러가고 있다.


이 불합리한 구조에서 피해자를 어떻게 구원할 수 있을까? 더 글로리, 모범 택시 등등 복수를 테마로 한 드라마들이 여태 까지 던져왔던 주제이다. 더 글로리는 주제를 제시하는 측면에서 보면 나름 괜찮은 완성도를 보여준다.  동은이 복수를 준비하면서 연진이의.이름을 계속 생각하는 부분이나, 복수를 향한 감정을 바둑에 빗댄 것도 매우 세련된 표현이다. 하지만 동은의 구원 과정을 표현하는 방식은 정말 허접하다 못해 시대착오적이다.


동은은 피해자와의 연대를 통해 가해자들과 맞서 싸우고 이를 극복해 나간다. 동은과 현남의 만남은 너무도 기능적이고 핍진성도 부족하다. 그저 피해자와의 연대를 만들기 위해 작가가 넣은 일종의 도구에 불과하다.  이전 까지 동은과 어떤 접점도 없는 상태에서 그저 쓰래기 통을 주우는 것만을 보고 뭘해도 할 사람이라 생각했다는 게 드라마적 허용으로 보기엔 개연성이 부족하다. 그나마 현남이 숨막히게 흘러가는 극 중 내내 활기를 넣어주지만, 그마저도 후반에 가면 신파로 점철될 뿐이다. 가정폭력을 다루는 방식도 지나치게 자극적이고, 감정에만 의존하고 있다. 더 글로리, 소년 심판 등 수많은 드라마들이 미성년자 혹은 여성에 대한 폭력을 직접적으로 카메라에 담아 가정 폭력을 묘사하는데, 이는 보는 이로 하여금 의도적으로 불쾌감을 느끼게 해 가정폭력의 심각성을 일깨워주려는 의도인 것을 알겠으나, 지나치게 자극에 의존한 연출 방식인거 같다. 2023년에도 폭력적인 자극만으로 사회문제의 심각성을 고발하는 방식을 선택하고 있다는 게 안타깝다.


다음으로 동은을 돕는 조력자들이 모두 동은이 필요할 때만 쓰이는 도구에 불가헸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특히 이 문제는 주여정이라는 말도 안되는 캐릭터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주여정은 철저히 문동은만을 위해 설계된 캐릭터이다. 문동은에게.피신처를 제공하고, 정신적인 위로 뿐만 아니라, 자살 까지 막아준다. 주여정의 서사는 문동은의 자살을 막기 위한 기능적인 쓰임에 지나지 않는다. 주여정의 안타까운 사연을 늘어놓고 그것에 대한 복수 방식도 동은이 연진에게 했던 것에 비하면 허접하다. 그저 교도소에 있는 죄수들을 이용해 물리적인 폭행을 하게 시키는 것인데, 몇년간 당해온 것치곤 그렇게 심하지 않다고 느껴진다.


주여정이란 캐릭터는 문동은의 복수를 완전히 무디게 만든 캐릭터인데, 주여정이 등장하기 전까지만해도 문동은은 죽음에서 돌아온 사자와도 같은 모습으로 박연진과 그녀의 패거리들을 몰아붙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주여정의 등장 이후로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더니, 비련의 여주인공이 되어버린 여주인공과 그 아픔을 품어주는 왕자님의 모습이 연출된다. 김순옥 작가의 여성상은 이미 2000년대의 파리의 연인에서 멈췄다. 상처입은 여성과 이를 품어주는 재력있는 왕자님 , 이 설정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어진다는 게 한숨만 나올 뿐이다.  미스터 션샤인에선 일본제국에 맞서 조선의.의병을 지켜낸 고애신이라는 여성을 통해 여성서사를 그리는 듯했으나, 이내 유진초이, 구동매, 김희성 등등 수많는 왕자님 형 캐릭터를 내세워 그녀를 도와준다는 인터넷 소설판 로맨스를 연출하기도 했고 시크릿 가든에선 스턴트 우먼으로 일하는 길라임을  내세웠으나 여전히 재벌 2세 왕자님과 이뤄지는 신데렐라 스토리를 그려냈다. 김순옥 작가는 아직도 그 신데렐라 판타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그린 여성서사는 완전히 엇나갔으며 그냥 인터넷에서 잘팔리는 로맨스 소설 따위에 지나지 않는다.  문동은이 주여정의 손길을 크게 받지 않고 스스로 박연진과 그녀의 패거리들을 몰아붙이는 심판자처럼 연출되었다면, 나는 이 드라마의 방식에 동의했을 거고 관객들이 원하는 것도 그것일 거라 생각한다.


다음으로 어머니를 표현하는 방식이 저급하다. 동은엄마 캐릭터는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캐릭터이다. 몇년 전 드라마 펜트 하우스에서도 막장어머니들이 등장하지만, 거기에 나오는 어머니는 적어도 모성이라는 가치는 훼손하지 않는다. 천서진은 자신의 욕망을 위해 딸을 의도치 않게 몰아붙이나 딸을 위해 범죄를 덮고 묵인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쉽게 말해 아무리.막장짓을 하는 어머니라도 모성이 가진 가치를 어머니 스스로 쉽게 버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근데 더 글로리는 그 모성이라는 가치를 있는 쉽게 버릴 수 있는 것처럼 묘사한다. 모성마저 쉽게 버려지는 냉혹한 현실을 묘사했다고 반박할 수도 있지만, 그런 연출의도 였다면 동은 엄마를 처음부터 현실적인 인물로 그렸어야만 했다. 동은 엄마가 첨부터 미쳐서 그랬고 동은 엄마의.잘못이다라고 연출한 거면 1차원적인 악역을 만든 것에 지나지 않는다. 동은 엄마가 왜 모성을 져버린 것인지, 그것에 대한 현실적인 동기가 필요하다. 이 작가는 대체 모성을 무엇이라 생각하기에 이토록 어이없는 캐릭터를 만들었을까?


다음으로 동은의 복수가 너무 우연에 기대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는데, 몇년간 준비한 복수치곤 우연적으로 발생한 것이 많다. 현남의 남편이  윤소희 살인사건의 범행이 박연진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연진 엄마에게 연락해, 그녀를 겁박하는 것은 우연에 의한 결과가 아닌가, 설마 동은은 그것까지 예측한걸까? 연진 엄마가 현남의 남편을 차사고로 죽이는 것도 예측한 거고, 연진이 명오를 죽일거라 예측한건가.  이정도면 닥터스트레인지가 아닌가 싶다. 수많은 경우의 수를 본게 맞다.


정리하자면  더 글로리는 지금도 고통받을 피해자를 위해 제작되었다기엔 그들을 카메라에 담는 방식이 폭력적이다. 동은을 굳이 탈의 시켜야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불을 무서워하고 그것에.아직도 떨고 있다는 트라우마 정도로 보여줬다면 좋았을 테지만 속옷만 입은 동은의 모습을 그대로 노출 시킨 장면을 보면 이게 진짜 피해자를 향한 연민의 시선인지 모르겠다.


한마디로 위로라는 명목하에 자극적인 맛으로 중독시킨 싸구려에 불과하다.  백마탄 왕자님의.도움을 받는 여성은 여전하며, 피해자들은 동은의.도구에 불과할 뿐이다.


진실된 위로란 무엇일까.


가해자의 모든 것을 빼앗아야만 피해자의 삶이 행복해질 수 있을까? 그저 우리는 가해자가 무너지는 것에 카타르시스를 느끼기 위해 더 글로리와 같은 싸구려 드라마를 찾는 걸지도 모른다.  조두순출소날 그의.집앞에 찾아갔던 이들중 피해자를 위해 행동한 이들이 몇명이나 있을까?  그들의.마음 속에는 악을 징벌하는데서 오늘 카타르시스만이 있었을 것이다.



더 글로리 역시 악을 징벌하기만 할 뿐 피해자를 향한 따듯한 시선은 없다.


위로라는 변명을 하기엔,문동은의 삶이 너무 극적이다. 잘생긴 병원장이 도움을 준다는 게 말이 되는가 그것도 첫눈에 반했다는 이유로


이건 기만에 가깝다. 실제 피해자들 중 문동은 같은 이들은 극히 소수다 못해 없을 텐데, 현실적인 복수극을 만들어도 모자랄판에, 잘생긴 왕자님이 복수를 도와주는 판타지를 만들어놨으니 어이가 없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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