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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펭가루 May 19. 2022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

해설

  워낙 제목이 유명하기 때문에 내용도 재미있겠지 싶어 당근 마켓에서 샀지만, 몇 달 정도 책장에서 발효시켜 두었습니다. 문득 더 묵혀두다가는 평생 읽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꺼내들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책 소개 따위를 찾아봤을 때는 분명 가독성이 매우 좋고 책장이 끊임없이 넘어간다고 했는데, 저에게는 여러 의미에서 조금 읽기 힘들었던 책입니다.

  읽기 힘들었던 이유는 이 책을 읽으면서 백년의 고독과 파리대왕이 떠올랐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일단 백년의 고독처럼 마술적 리얼리즘이 재밌게 양념되어 있어서 매우 재미있기는 합니다. 그런데, 백년의 고독에서는 같은 이름을 반복적으로 사용하면서 저의 주의력을 시험했던 반면, 이 책은 인물들의 대사에 따옴표를 하나도 적어두지 않음으로써 저의 집중력을 테스트했습니다. 말투(~~하오, ~~하세요)로 누가 말한 것인지 구분이 가능한 경우도 있으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마지막으로 메시지 측면에서 파리대왕과 비슷합니다. 인간의 본성에 관하여, 인간이 살아가는데 이성(理性)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이 책은 일종의 사고 실험을 하고 있습니다. 마르케스가 파리대왕을 썼다면 아마도 이렇게 작품을 만들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파리대왕은 그래도 민음사의 번역을 욕하면서 투덜대느라 정신없었기 때문에 비교적 감정의 동요 없이 읽을 수 있었는데, 이 책은 읽기 너무 괴로웠습니다. 가독성 때문은 아니고, 끔찍한 장면들 때문입니다.

  어떤 남자가 차를 운전하다가 눈이 멀게 되면서 이 소설은 시작합니다. 눈이 머는 것이 사람 간에 전염된다는 설정입니다. 그리고 국가는 눈먼 사람들을 어느 병동에 모두 가둬버립니다. 이 소설은 주로 병동 안, 밖의 눈먼 사람들이 어떻게 생활하는지, 그들 간에 어떤 갈등이 나타나는지에 대해서 다룹니다. 작가가 글을 참 잘 쓴다고 느꼈는데, 그 이유는 만약 이 책의 내용이 현실에서 일어난다면 이 책의 줄거리가 그대로 나타날 것이라 느낄 정도로 내용이 몹시 설득력 있고 현실적이기 때문입니다.

  눈먼 사람들은 짐승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눈이 멀었다는 것만으로 이렇게나 인간성이 사라질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충격적입니다. 배변 장소를 구분하지도 못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그들에게는 오직 본능만이 남아 있습니다. 병동은 오물 냄새로 가득하고, 그들은 스스로 몸을 청결히 하지도 못합니다. 병동 곳곳에서는 마치 짐승처럼 짝짓기를 하는 남녀의 소리가 때때로 들려오기도 합니다.

  그런데, 단 한 사람, 어느 안과 의사의 아내로 등장하는 여인만은 눈이 멀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순간의 기지를 발휘해 남편을 따라서 병동으로 들어갔습니다.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의 눈이 멀어가는 상황에서, 그들이 인간에서 짐승으로 변해가는 것을 보면서 그녀는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요? 실제로 그녀는 자신도 눈이 멀기를 바라기도 합니다. 그래도 다행히 그녀가 속한 병실은 알게 모르게 눈먼 자들을 관리하고 도와주는 그녀가 있기에 그나마 정돈되고 인간성이 살아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녀의 시계를 저는 파리대왕의 돼지가 지니고 다니는 이성의 상징, 안경과 비슷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얼마 가지 않아 그녀는 시계를 잃지만, 그녀는 눈을 뜨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이성이 남아있습니다. 그녀는 심지어 자신의 남편이 색안경을 끼던 여인과 성관계를 가지는 것을 두 눈으로 보고서도 그들을 용서합니다. 그녀는 선(善)의 화신으로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갑니다.

  본격적으로 읽기 힘들었던 부분은 총을 든 남자가 등장하는 장면부터였습니다. 그는 총을 들고 있고, 주위 눈먼 자들을 쇠 파이프로 무장시켜 무력으로 모두에게 보급되는 식량을 독점합니다. 그리고 식량을 먹고 싶다면 가지고 있는 돈이나 보석 등 값이 나가는 물건을 바치라고 합니다.

  일종의 식량 전쟁이 발생하는 상황 자체는 그럴듯합니다. 그들은 짐승이기 때문에 먹을 것을 두고 다투는 것은 당연하니까요. 그런데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는 상황에서 그는 돈을 어디에 쓰려고 모은 것일까요? 처음에는 그저 어리석다는 생각만 했습니다. 그와 무장한 무리들이 눈을 뜰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는 뜻일 수도 있지만, 눈이 멀어서 쓰지도 못하는 돈을 모아서 무엇 하나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생각하다 보니 돈을 모으는 것은, 그것이 가치가 있든 없든 인간에게 몹시 중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들보다 위에 있고 싶어 하는, 모두의 위에서 군림하고 싶어 하는 욕구를 말하는 듯합니다. 우리에게는 알게 모르게 남들을 짓밟고 싶어 하는 심리가 슬프게도 내재되어 있습니다.

  식량 독점은 그나마 봐줄만했습니다. 무장한 무리들이 각 병실로부터 여자를 요구하는 대목부터는 정말 읽기 괴로웠습니다. 파리대왕 때도 마찬가지였는데, 도대체 얼마나 세상, 인간의 본성을 어둡게 인식하면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것일까요? 한편, 「몽고반점」과는 정 반대의 인식이 돋보입니다. 「몽고반점」에서는 원시성이 비폭력성 (물론 글을 읽는 사람 입장에서는 너무도 낯선 장면들 때문에 폭력적이라고 인식할 수 있으나)을, 현실의 차가운 이성이 오히려 폭력적인 것이었는데 말입니다. 아무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자극적인 내용 때문에 글은 잘 읽히기 시작합니다. 글이 잘 읽히면 읽힐수록 더 고통스럽습니다. 비극적인 내용이 더 빠르게 머릿속에 들어오기 때문에, 그리고 자극적인 내용을 좋아라하며 읽는 저 자신의 기분 나쁜 면모를 발견하기 때문에 고통스럽습니다. 남편을 먹여 살리기 위해 몸을 바치는 여자들, 그리고 아내가 몸을 바쳐 얻어온 빵을 먹는 남편. 야생보다도 충격적인 장면의 연속입니다. 끌려가서 겁탈 당하기 전, 같은 병동 남자들과 관계를 가지는 여인들의 모습은 그들의 처한 상황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충분히 보여줍니다. 결국 이 비극은 살인이라는 다른 비극으로 마무리됩니다. 살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아이러니하게도 눈이 보이는 여자는 총을 든 남자를 죽이기로 결심합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시력을 사용하여 가위로 남자의 목을 찌릅니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이성이 때로는 사람을 죽이는 차가운 무기가 되기도 하는 법입니다. 어쨌든 어쩔 수 없는 유일한 선택이었습니다. 솔직히 저는 그 남자가 죽을 때 너무 통쾌했습니다.

  소동 속에 병동에는 불이 났고, 격리되었던 눈먼 사람들은 수용소 밖으로 나오게 됩니다. 군인들이 지키고 있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수용소 밖은 조용하기만 합니다. 온 세상 사람들의 눈이 모두 멀어버린 것입니다. 병동 밖만 나가면 어떻게든 될 것이라 생각했을 수 있지만, 그들에게 희망은 없습니다. 더 이상의 식량 보급도 없습니다. 불을 발견하고 놀라워하는 사람들, 식료품점을 기어 다니며 마치 채집하듯 먹을 것을 찾는 사람들, 모두 벌거벗고 돌아다니는 사람들. 태초의 인류가 처한 환경을 비유하는 듯 결국 짐승만이 가득한 야생이고, 원시로의 회귀입니다. 안과 의사의 아내는 "하지만 우리는 아직 살아 있어."라고 이야기하지만, 색안경을 끼던 여인은 "하지만 내 생각으로는 우린 이미 죽은 거예요, 다르게 말하자면, 우리는 눈이 멀었기 때문에 죽은 거예요"라고 대답합니다. 이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 추악한 모습들을 경험했기 때문에 그녀는 사람들이 이미 죽었다, 즉 사람이 아닌 존재가 되었다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다행히 안과 의사 부부가 살던 집은 안전했고, 그들은 정착을 합니다. 인류의 발전을 보는 듯합니다. 초기 인류들이 정착을 하고, 규율을 정하며 사람이 되어 갔듯이, 그들도 눈이 멀었지만 점점 사람이 되어 갑니다. 그들은 부부의 집에서 살며 목욕을 하기도 하고, 색안경을 끼던 여인은 안대를 한 노인의 등을 밀어주기도 하며 인간다움을 조금씩 회복해 갑니다. 첫 번째로 눈이 먼 남자의 집에서 살고 있던 작가가 한 말을 통해 이 책의 작가 혹은 작중 인물들의 소망, 다짐 따위가 느껴집니다.

"자기 자신을 잃지 마시오, 자기 자신이 사라지도록 내버려두지 마시오."

  길었던 이야기는 모두가 눈을 뜨게 되며 막을 내립니다. 한때는 신에게 부끄러운 짐승의 모습을 들키지 않기 위하여, 혹은 끔찍한 본성을 인간의 내부에 심어놓은 신으로부터 그의 볼 권리를 박탈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성당에 있는 성상의 눈을 모두 가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눈을 뜨며 다시 사람이 되었습니다. 안과 의사는 몇 주 뒤 안대를 한 노인의 수술을 하겠다고 말하기도 하며 상당히 낙관적이고 희망찬 미래를 이야기합니다. 저는 이 결말이 어딘가 맞지 않는 퍼즐인 것처럼 어색하기만 합니다.

  과연 눈을 뜬 사람들이 사람으로서 다시 예전처럼 살아갈 수 있을까요? 서로의 그 추악하고 더러운 면모를 경험한 그들이 트라우마를 딛고 다시 스스로를 문명인이라 부를 수 있을까요? 파리대왕의 랄프는 그 누구도 아닌 군인에게 구조를 당했습니다. 그가 섬을 탈출해도 섬 밖은 군인들이 즐비한 폭력적인 세상입니다. 마찬가지로 눈먼 사람들도 눈은 떴지만, 세상, 그리고 그들의 본성은 변하지 않습니다. 다시 눈이 먼다면 같은 운명이 맹세코 반복될 것입니다.

  흥미롭고 잘 읽히기만 하는 공항 소설을 기대했는데 웬걸, 열어보니 참혹한 장면의 연속이었습니다. 훌륭한 책이라고 생각하지만 읽는 내내 너무 슬펐던 기억을 떠올린다면 이 책을 저는 다시 읽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죽기 전에 저의 눈이 멀지 않기를 바랍니다. 눈이 멀더라도 주변 사람들의 눈은 멀지 않아 제가 계속 사람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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