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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하육수 Nov 14. 2024

당신의 인생책은 무엇인가요?

카페앱을 켰다가 인기랭킹글에 눈길이 확 쏠렸다. 


‘인생책 하나씩 추천해 주세요’


이 카페는 출산, 육아, 시댁, 쇼핑, 남편 험담 등 인생의 소소한 이야기부터 TV프로그램이나 연예인 뒷담화 등 자극적인 글이 항상 랭킹 순위에 올라오는 곳이었다. 여기에 갑자기 책 추천 글이 툭 튀어나오니 이질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궁금해서 클릭해 보니 댓글이 무려 400여 개가 달려있었다. 


10명 중 6명이 1년에 1권 책을 읽을까 말까 한 이 세태 속에서 자신의 인생책이 무엇인지 경쟁하듯 댓글을 단 사람들이 신기하면서도 그래도 아직 자신의 인생책들은 한 권씩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구나 싶어 괜한 안도감이 들었다. 도대체 다른 사람들은 어떤 책을 자신의 인생책으로 꼽았을까 싶어 댓글을 찬찬히 살펴봤다. 


▒ <연을 쫓는 아이>, 할레드 호세이니,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 <인생>, <허삼관 매혈기> 위화, <상실의 시대(노르웨이의 숲)> 무라카미 하루키

▒ <미움받을 용기> 기시미 이치료, 고가 후미타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신영복

▒ <대지> 펄 S.벅, <생의 한가운데> 루이제 린저

▒ <인간의 굴레>, <달과 6펜스> 서머싯 몸, <데미안>, <수레바퀴 아래서> 헤르만 헤세 

▒ <긴긴밤> 루리,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 <앵무새 죽이기> 하퍼 리, <호밀밭의 파수꾼> 제롬 데이비드 셀린저

▒ <파친코> 이민진, <태백산맥> 조정래     

열거한 것 외에도 수많은 책들이 줄줄이 달려 있었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작가의 작품이나 요즘 소설이나 있겠지 했던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벗어나고 고전소설에서부터 요즘 소설, 대하소설, 에세이, 자기 계발서 등 다양한 책들이 굴비 엮듯 댓글에 꿰어져 있었다. 나도 책 좀 읽었다는 책부심이 있는 편인데 명함도 못 내밀만큼 안 읽은 책들도 많았고 이게 인생책? 하며 의문을 가진 책들도 있었다. 유명한 책이라 해서 꾸역꾸역 겨우 읽은 책도 있었고 흰 건 종이요 검은 건 글씨구나 하며 책에 타액을 묻히며 졸다가 도중에 덮어버린 것들도 많았다. 


나는 책에도 운명적인 타이밍이 있다고 믿는다. 꼭 필요한 순간에 마주친 책은 영향력이 막강하니까. 그런 책을 만나면 우연히 이상형을 마주친 것처럼 눈이 번쩍 뜨인다. 문장들이 세포 하나하나에 콕콕 박혀 소름을 일으킨다. 좋은 책이냐 나쁜 책이냐는 어쩌면 내용 자체보다 얼마나 적절한 타이밍에 등장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있는지도 모른다. - <따라 쓰기만 해도 글이 좋아진다> 김선영(글밥) 중에서


삶의 궤적이 사람마다 다 다르듯이 책도 어떤 사람에게, 어떤 타이밍에 만났느냐에 따라 내 인생책이 될지 아닐지가 결정되는 것 같다. 나 또한 어렸을 때 ‘이게 무슨 말이야, 방귀야.’하며 넘겼던 책을 나이가 들어서 다시 봤을 때 ‘이런 명작을 그 따위로 생각했다니!’하며 읽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아마 그동안 켜켜이 쌓인 세월과 경험과 기억들이 책의 의미를 다르게 만들어줘서 그런가 보다.  


이런 타이밍에 맞지 않게 누군가의 인생책을 읽는다면 기대하고 보다가 와닿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다양한 인생책을 보면서 내 인생책과 겹친다면 내적 친밀감이 쌓일 것이고 다르다면 나의 책 스펙트럼을 좀 더 넓힐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책을 추천해 달라 하면 나는 솔직히 괜히 있어 보이려고, 책 좀 읽었다고 과시하려고 정말 내 인생의 책이 아닌 고전소설이나 <이기적 유전자>, <사피엔스> 등 수박 겉핥기식으로 읽은 책을 들먹이곤 했다.(물론 이 책을 진심으로 자신의 인생책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여기서 언급할 때는 책부심으로, 있어 보이려고 그런 허물은 다 벗어버리고 진짜 내 인생책 Best 3을 소개해보도록 하겠다. 


1. 제인에어(샬롯 브론테)

앞서 있어 보이려고 고전소설을 들먹였다 해놓고서 바로 고전소설을 인생책으로 꼽은 게 아이러니긴 하지만 이 책은 정말 나의 찐 인생책이다. 이 책을 처음 접한 건 초등학교 4, 5학년쯤이었다. 그때 집에서 안 쓰는 물건을 파는 벼룩시장을 학교에서 진행했는데 의무적으로 꼭 하나는 사야 했다. 솔찬히 눈에 들어오는 게 없던 나는 마감 시간이 임박해서 아무거나 집었는데 그게 <제인에어> 책이었다. 그 집에서도 한 번도 펼치지 않았는지 책을 펼치자 쩍 벌어지는 소리를 내며 쿰쿰한 종이 내를 풍겼다. 고아로 외숙모와 사촌들의 핍박 속에서도 꿋꿋이 이겨내고 열악한 학교에서도 씩씩하게 생활하는 그녀의 모습이 그 당시의 나를 열광하게 만들었다. 나 스스로 나약하다 생각하던 시절 나는 마치 제인에 빙의된 것처럼 그녀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 얼마나 더 강해져야 그녀처럼 될 수 있을까 그 생각뿐이었다. 힘든 일이 있으면 성경처럼 제인에어를 펼쳐놓고 읊곤 했다. 그 책이 좋아 SNS나 예명을 만들 때 제인에어나 샬롯 브론테의 이름을 본 따기도 했다. 


2. 아르센 뤼팽(모리스 르블랑)

이 책은 아직 독서에 큰 관심이 없던 어린 시절 엄마가 읽어보라고 추천한 책이다. 어린이용으로 나온 책으로 기억되는데 어려운 프랑스 지명이나 사람 이름이 나오면 헷갈려서 종이에 적어놓고 책과 종이를 왔다 갔다 하며 읽는 번거로움은 있었지만 그 번거로움이 이 소설의 스릴과 즐거움을 이겨낼 수 없었다. 기암성, 수정마개 편을 읽고 얼마나 흥분했는지 모른다. 기다란 중절모와 번쩍이는 외알 안경, 펄럭이는 바바리코트를 휘날리는 뤼팽은 내 인생 처음 접한 섹시한 남자였다. 나는 꿈속에서 내가 아는 미소년 얼굴을 뤼팽에 갖다 붙여 손도 잡고 같이 여행하면서 사랑을 나누는 등 나는 뤼팽이란 캐릭터에 푹 빠져버렸다. 내가 공부는 안 하고 뤼팽 소설만 뻔질나게 보니 엄마가 추천해 놓고 엄마가 열받아 나에게 뤼팽책 금지령을 내리기도 했다. 최근에 전집으로 출판된 책을 다시 읽어봤는데 어렸을 때의 짜릿함, 흥분, 재미는 사라지고 없었다. 하지만 나에게 책 읽는 즐거움을 알게 해 준 물꼬 같은 인생책이다. 


3. 나목(박완서)

나에게 가장 좋아하는 작가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이 분을 꼽는다. 박완서. 지금으로부터 어언 20년 전(벌써?!)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란 프로그램이 있었다. 책 읽을 시간은 없어도 TV 볼 시간은 있었던 시절, 거기서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란 책을 알게 되었다. 6.25를 겪은 어느 할머니의 어린 시절 이야기겠거니 치부하며 독서실에서 문제집 꼴도 보기 싫은 날 그 소설책을 턱을 괴고 무심히 펼쳤다. 하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턱 괸 손을 빼고 허리를 곧추 세우며 책에 몰두하게 됐다. 어린 시절의 개성과 서울의 풍경을 마치 내 눈앞에 펼쳐놓은 듯 선명하게 묘사했다. 마치 작가가 "옛다, 이것 봐라. 전쟁시절 얘기라고 구닥다리 취급하지 마라!" 하며 나에게 호통치는 것 같았다. 그 시절의 젖 비린내 나는 아카시아 꽃내음이 독서실에 가득 찼다고 착각할 만큼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 이후로 나는 박완서 작가의 작품을 찾아 읽었는데 그중 제일 좋아하는 작품이 <나목>이다. 전쟁이라는 극한의 상황에서 두 아들을 잃은 엄마 앞에 죄인처럼 괴로워하던 주인공은 자신이 일하는 PX 초상화 가게에서 화가인 옥희도를 사랑하게 된다. 완구점과 명동성당에서 그들이 맞잡은 손을 보며 내가 괜히 오금이 저리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황량한 시대에서도 사랑을 갈구하고 ‘한쪽이 보기 싫게 일그러진 지붕’을 바라보며 괴로워하던 20대의 섬세하고 예민한 그녀는 시대가 한참이나 지난 나의 20대와 많이 닮아 있었다. 글 쓰는 사람이라면 본받고 싶은 필체가 있기 마련인데 나는 박완서의 필체를 닮고 싶다. 담담하면서도 자신과 세상을 이야기할 때 시니컬하게 툭 던지듯 말하는 능력. 그러면서 사람들이 외면하는 것을 정성스럽고 따뜻하게 매만져주는 글. 나의 글쓰기 교과서인 <나목>이 내 인생의 책이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더 많은 책들이 내 인생의 책이 될 것이고 그런 책들이 쌓이면 쌓일수록 내 인생은 좀 더 풍족하고 다채로워질 것이라 믿는다.     


당신의 인생책은 무엇인가요?


(이미지출처: 교보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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