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 한영과 번역전공 석사학위청구 종합시험 후기 및 결과
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은 특수 대학원으로 석사학위를 받으려면 논문이 아닌 종합시험에 통과해야 한다. 모든 시험은 일주일 안에(번역 전공은 3일 안에) 끝나고 그렇게 바로 졸업 여부가 결정된다. 통번역대학원답게 참 실용적인 석사학위청구 방식이다.
번역전공의 석사학위청구 시험 과목은 다음과 같다.
총 4과목, 세부 과목까지 합치면 6과목을 합격해야 한다. (종합번역 내 두 과목은 총점으로 합격 여부를 가림)
시험 첫째 날(11/28, 월)에는 종합번역 A-B(한영) 시험을 봤다. 첫날이라 그런지 긴장이 많이 됐다. 아날로그시계가 있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아침에서야 들었다. 준비하는 동안 남편이 급하게 여기저기 알아봐 주더니 학교 문구점에서 시계를 판다는 걸 알려줬다. 일찍 집을 나서서 시계도 샀지만 결과적으로는 시험장에 디지털시계가 있어서 굳이 필요는 없었다(자리가 뒤쪽이거나 기둥 뒤라면 필요할 수도 있겠다).
종합번역 시험은 번역전공이 아닌 한영과도 함께 보기 때문에 애경홀에서 진행되는데 애경홀 책상과 좌석이 시험 보기에 가장 좋은 형태는 아니다... 우선 책상에 마이크 세팅이 고정되어 있고 의자 역시 애매한 위치에 고정되어 있어 엉덩이를 의자에 반쯤 걸치고 몸을 앞으로 숙이고 시험을 봐야 한다. 그 자세로 두 시간 동안 쉬지 않고 글을 써야 하는데 끝나고 나면 몸이 쑤신다.
종합번역은 세부 네 과목 시험지가 모두 주어지고 시험 현장에서 텍스트를 확인한 다음 두 과목을 고르는 식으로 진행된다. 사실 시험 전에는 마지막 학기 수업을 들었고 가장 연습도 많이 했던 과학기술번역, 그리고 제일 만만할 것이라 생각했던 일반번역을 고르려고 생각 중이었다. 그런데 막상 시험장에 들어가 텍스트를 읽어보자 1학년 이후로 제대로 연습한 적도 없던 산업경제와 전혀 일반번역 같지 않았던 일반번역을 골랐다...; 다른 동기들도 상황은 비슷했다.
종합시험이 끝나고 동기 언니가 찾아서 보내준 종합시험 지문은 이랬다:
[2022 종합번역 AB 졸업시험 지문]
정법: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92855
과기: http://m.boannews.com/html/detail.html?idx=110902
산경: https://gscaltexmediahub.com/energy/energy-column/opec_report/
일반: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13936
위의 지문을 A4 2/3페이지 정도로 편집해 출제되었는데 무엇 하나 수월해 보이는 게 없는 지문들이었다. 집에 가는 길에, 밥 먹으면서, 잠들기 전에 계속 내가 한 실수가 생각나고, 검색해 보고... 그랬다.
둘째 날 시험은 종합번역 B>A였다. 영한은 한영보다 훨씬 수월하게 시험을 봐서 홀가분하게 시험장을 떠났다. 이번에도 내 의지와 상관없이 산업경제번역, 일반번역을 골랐다. 산업경제번역은 전력 기업이 탈탄소화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였고 일반번역은 미쉐린가이드의 시초에 대한 (화려한 관용구와 미사여구가 가득한) 내용이었다. 그런데 낮잠을 자고 일어나 큰 용어 실수를 한 걸 깨달았다...ㅠ decarbonization을 net zero와 헷갈려서 탄소 중립이라고 번역을 한 것이다...! 물론 통대 종합 시험은 원문의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를 가장 중점적으로 판단하기는 하지만 채점자에 따라 충분히 감점 사유가 될 것 같았다. 용어를 제외한 내용 전달은 전체적으로 무난하게 한 것 같은데... decarbonization이 합격자 발표가 날 때까지 계속 날 괴롭혔다.
셋째 날 시험은 오전에 문학번역, 오후엔 인문사회번역이었다. 두 시험은 앞선 종합시험과 다르게 언어 페어를 선택할 수 있다. 한영 지문 하나, 영한 지문 하나가 주어지는 것이다. 나는 최종적으로 둘 다 영한을 골랐는데 문학번역은 이민진 작가의 Free Food For Millionaires 일부가, 인문사회번역은 trauma의 의미와 종류에 관한, 역시 화려한 관용구와 미사여구가 가득한 글이 나왔다. 문학번역은 걱정을 많이 했는데 개인적으로 배경지식을 가진 내용이 많이 나와서 자신감을 가지고 썼고, 인문사회번역도 정신이 나가려는 걸 계속 붙잡고 끝까지 마무리했다.
그렇게 모든 시험이 끝나고 동기들과 사진도 찍고 밥도 먹으러 갔다. 2년이 이렇게 끝나는 건가? 싶은 느낌, 수능 끝났을 때 그 느낌을 오랜만에 다시 느껴봤다. 코로나 때문에 1년 반은 온라인으로만 학교를 다녀서 사실 좋은 점도 많았지만 늦게나마 동기들과 어울리는 게 너무 재밌어져서 헤어짐이 아쉽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그리고 시험 따위는 잊고 신나게 12월을 보내고 여기 그레나다에 와서 2주 정도 지낸 뒤 1월 10일, 다음 날 종합시험 합격자 조회를 할 수 있다는 메일이 왔다.
이곳 시간으로는 1월 10일 저녁 9시에 조회가 가능했다. 하루 종일 손에 아무것도 안 잡히고... 괜히 짜증이 많이 나고... (남편은 가만히 있다가 봉변을 여러 번 당했다) 통대는 졸업과 수료가 큰 차이가 없다는 걸 여러 번 찾아보고... 졸업 후에도 5년이나 시험 볼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걸 기억하고... 그랬다. 다 맞는 얘기지만 해외에 있어 프리랜서로 활동할 수밖에 없고 최소 1년은 다시 시험을 보러 한국에 갈 수 없는 내 입장에서는 합격이 간절했다.
새벽 일찍 하루를 시작하는 이곳 생활에 패턴이 맞춰져 저녁 9시까지 안 자고 버티기가 힘들었다. 잠깐 잠들었다가 일어나 보니 9시 3분 전이었다. 침대에 누워 조용히 핸드폰으로 종정시에 들어가 봤다. 심장이 엄청 빨리 뛰었다.
그리고 결과는....
와우 ㅎㅎㅎ
그렇게 나는 그레나다에서 통대를 졸업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