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하지만 시급하지 않은 문제들에 대하여

by 류연X

최근 일하면서 To-Do List 쓰는 방식을 바꿨다.


이전에는 그날 해야 할 일들을 쭉 나열한 후, 병목과 시급성을 고려하여 우선순위를 정리했다.

하루가 끝나고 못 다한 일들은 다음 날로 이월됐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 되면 또 그날의 상황에 따라 우선순위를 재정렬했다.


이 방식은 꽤 효율적이었고, 당장 눈 앞에 있는 급한 일들은 대부분 처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그동안 급한 일이라 직접 해오긴 했는데 이걸 꼭 내가 직접 해야 되나 싶은 생각이 드는 상황들이 잦아졌다. 그리고 런 업무들 중에 팀원 또는 AI에게 위임할 수 있는 일들은 위임하고, 대신 검토에 시간을 할애하는 방향으로 To-Do list를 손보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금 바꾼 To-Do List 구조는 다음과 같다.

흔히 아이젠하워 매트릭스(Eisenhower Matrix)라고 부르는 방식이다.


세로축은 중요성, 가로축은 시급성이다.


1. 중요하고 시급한 일

2. 중요하지만 시급하지 않은 일

3. 중요하지 않지만 시급한 일

4. 중요하지도 시급하지도 않은 일


당연히 출근하면 1번에 집중한다. 이전엔 1번이 완료되고 나면 3번에 달려 들었다면, 이제는 3번은 미리 미리 팀원에게 맡기고, 대신 2번에 집중하려 노력하고 있다.

시간 관리를 잘하는 분들의 자기계발 글들을 보면, 2번 업무는 기한을 정하고 계획을 별도로 세워서 관리하라고 하는 것 같다.


하지만, 실제 일을 하다 보면 깨닫게 된다.

계속 새로운 1번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애초에 시급하지 않았던 2번은 새로 등장한 1번에 밀려서, 당초 2번을 위해 세웠던 계획은 다시 미뤄지게 된다.


사실 조직의 미래를 그리고 무형의 자산을 만드는 일들 대부분은 2번(중요하지만 시급하지 않은 일)에 속하는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며칠 전 잠들기 전 이 이야기를 아내에게 했다.


평소에도 갑작스러운 애드혹(Ad hoc)성 업무를 특히나 싫어하던 아내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했다.


"나는 회사에서 2번 같은 일만 하고 살면 좋겠다"


처음에는 웃고 넘겼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꽤 의미 있는 말이었다.


세상에는 일을 속도감 있게 빠르게 처리하면서 효능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는 반면,

오히려 긴 시간 동안 한 가지 문제를 깊이 파고드는 일에 역량을 가진 사람도 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조직의 장기 전략을 만드는 데 더 잘 맞을 지도 모르겠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국가도 마찬가지 아닐까?


최근 『소멸하는 일본, 최후의 해법』이라는 책을 소개 받아 읽었다.

한국경제에서 일본 특파원으로 수년간 활동하셨던 기자 분이 그간 작성해 온 여러 칼럼들을 엮어서 책으로 내신 것 같다.

인구 감소와 지방 소멸 문제를 우리보다 앞서 경험하고 있는 일본에서, 각종 사회 문제들에 대해 어떻게 대응해오고 있는지에 대해 여러 사례들로 소개해 주셨는데, 하나하나 참고할 만한 인사이트들이 많아 재미있게 읽었다.


일본이 제시한 대표적인 대응 전략을 요약해보자면 크게 네 가지다.


1. 여성을 일하게 한다.

2. 노인을 더 오래 일하게 한다.

3. 외국인 노동력을 활용한다.

4. 그리고, 제일 중요해 보이는 '노동 생산성'을 높인다.


단순해 보이지만, 매우 함축적인 과제들이다. 이 과제들은 단기간에 수행될 성격도 아니고, 그 결과 또한 즉각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여성의 경력 단절을 줄이는 문제는 단순히 채용 정책의 문제가 아니다. 육아, 교육, 노동시장 구조까지 함께 바뀌어야 한다.


노인이 더 오래 일하는 사회 역시, 지금 논의 되고 있는 정년 연장이라는 한 가지 정책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기업의 인사 구조, 노동시장 관행, 사회 인식이 함께 바뀌어야 한다.


외국인 노동력 문제는 더 복잡하다. 지방 농어업, 제조업, 의료(간병) 현장에 즉시 전력감을 투입 하는 것은 미봉책에 불과하다. 이민 정책, 사회 통합, 문화 갈등까지 고려해야 한다.


생산성 문제는 아마 가장 어려운 과제일 수도 있고, 위 3가지에 비하면 차라리 쉬운 과제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돈과 기술로 해결될 수 있는, 투자 대비 효익을 고려한 '자본'의 영역이라고 판단된다.


이 네 가지는 오늘 정책 하나를 발표한다고 해서 내일 해결되는 문제들이 아니고, 10년, 20년, 어쩌면 한 세대 이상이 지나야 변화가 보일 것이다.


일본은 최소한 이 문제를 '아주 긴 시계열의 과제'로 인식하고 대응하고 있는 것 같다.


한국은 이런 장기 과제를 얼마나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을까.


위 문제를 생각하며, 한국의 정치 시스템을 생각해 보면 조금 마음이 답답해 진다.


대한민국 대통령의 임기는 5년이고, 국회의원의 임기는 4년이다.

그리고 정치인은 결국 다음 선거를 통해 평가 받는다.


그러다 보니 결국 정치권은 자연스럽게 '중요하고 시급한' 과제에 집중하게 된다.


환율, 실업률, 물가 상승, 부동산, 주가, 금융 위기, 어떤 때는 심지어 전 정권 때리기와 같이 민생에는 아무런 영향 없는 이슈들까지.


이런 문제들은 당장 해결하지 않으면 정치적 타격이 크기 때문에, 정부는 대부분의 에너지를 이런 과제들을 수행하는데 사용할 것이다.


반면, 인구 구조나 교육 시스템, 지방 발전과 도시 구조 같은 문제들은 훨씬 긴 시간을 필요로 하는, '중요하지만 시급하지 않은' 과제들이다.


이런 과제들은 오늘 해결하지 않아도 당장 아무런 정치적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회사와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게 뒤로 밀린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과제들이야말로 대한민국의 미래를 결정하는 과제들이다.


흥미로운 것은, 알아보니 일부 국가들은 아내가 이야기한 것처럼 '2번 과제'들을 전담하는 조직을 구성하여 운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핀란드의 미래위원회(Committee for Future)는 정부 부처가 아닌 국회 내 상설 위원회 중 하나로, 일시적인 자문 기구가 아니라 법안을 심의하고 예산을 논의하는 공식적인 권력 구조 안에서 역할을 수행한다.


미래위원회는 여야 의원 17명으로 구성되어, 한국과 같은 5년 단임제 국가에서 흔히 발생하는 '정권 교체 시 정책 폐기 리스크'를 최소화하고 20~30년 이상의 장기 어젠다를 관리한다.


핀란드 정치권에서는 이 미래위원회의 위원장을 맡는다는 것은 정책적 깊이와 미래에 대한 통찰력 뿐만 아니라, 당장의 정쟁에서 벗어나 국가의 백년대계를 설계한 인물이라는 브랜드를 갖게 되어 총리로 가는 엘리트 코스로 통한다고도 한다.


싱가포르 역시 '2번 과제'를 잘 하는 국가로 손꼽힌다.


핀란드와 다른 점은, 핀란드가 국회에서 초당적이고 민주적인 합의를 통해 미래를 준비한다면, 싱가포르는 총리실 직속의 전략기획국과 미래전략본부에서 엘리트 관료에 의한 Top-down식의 치밀한 설계를 통해 미래를 준비한다는 점이다.


물론 다른 많은 나라들도 미래를 대비하는 연구 기관들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국가에서 '미래'를 논하는 기구는 한국의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처럼 대통령 직속 자문기구이거나 민간의 싱크탱크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핀란드나 싱가포르 같이 아예 제도적으로 '2번 과제'를 전담하는 조직을 구성하여 운영하는 사례들이 꽤 흥미롭다.


필자의 아이들이 태어난 2022년, 2025년의 출생아 수를 찾아보니 각각 연간 약 25만명 정도가 되는 것 같다.

연도별 출생인구 통계가 작성된 1970년대부터의 통계를 찾아보니 연간 100만명에서부터 매년 조금씩 감소되어 온 모양새다.


초고령화 사회에 접어들고 각종 사회문제들이 대두될 때, 유권자수에서 압도적으로 밀리는 우리 자식세대가 정치권의 관심을 받으려면 앞으로 년 뒤가 되어야 할까.


그렇기 때문에 대한민국도 '2번 과제'를 전담하는 조직이 있으면 어떨까 싶다.


이 조직은 다음 선거를 신경 쓰지 않는다. 내년 예산을 걱정하지도 않는다.

대신 30년 뒤, 50년 뒤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조직의 유일한 이해관계자는 현재의 유권자가 아니라 미래 세대다.


우리는 매일 바쁘게 일을 한다.


중요한 일도 하고, 시급한 일도 한다.


하지만 가끔은,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일들이 정말 중요한 일인지, 아니면 단지 급한 일인지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정작 가장 중요한 일이, 급하지 않다는 이유로 계속 뒤로 밀리고만 있지는 않은지도.

작가의 이전글아이들에게 간접투자를 시킵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