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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rry Chae Jan 19. 2021

Back to the 2015, London 4

가장 인상적이었던 하루

런던 여행에서 가장 인상적인 하루를 꼽자면 이 날이었다. 여행의 첫 일요일.


첫 일정은 주일 미사 참례.

한국에서는 잘 챙기지도 않는 주일 미사를 여행만 오면 그렇게 꼬박꼬박 가더라. 9년 전에도 런던에서 굳이 가톨릭 성당을 찾아 미사 참례를 했었다. 웨스트민스터 성당(Westminster Catholic Cathedral)은 가톨릭 대성당으로 영국 왕실의 대소사와 함께 등장하는 그 하얗고 화려한 성당과는 다른 곳이다.

웨스트민스터 가톨릭 성당. 조금은 독특한 건축 양식

여행을 와서 참례하는 미사는 조금 더 특별하다. 처음에는 이 여행이 무사히, 큰 사건, 사고 없이 다치지 않고 끝나기를 바라는 지극히 이기적인 기원으로 시작하는 나의 기도는 결국 한국에 있는 사람을 떠올리기 시작한다. 내가 잠시 뒤로 미뤄두고 온 현실, 그 안에서 묵묵히 살아가고 있는 소중한 사람들에게 약간의 부채감을 느끼며 답답한 현실에서도 그들이 안녕하기를 기원해본다.


미사가 끝나고 밖으로 나왔는데 아니다 다를까 비가 오기 시작했다. 일기예보를 확인하긴 했지만 가벼운 비에는 우산을 꺼내지 않는 이곳 사람들처럼 나도 우산 없이 비를 맞으며 다녀볼까 하고 우산은 숙소 캐리어 안에 고이 잘 두고 나왔는데 나의 허세가 무색하게 갑자기 소나기가 무섭게 쏟아진다.


웨스트민스터 사원(Westminster Abbey) 국회의사당(빅 벤, Big Ben)의 뒷모습만 빠르게 눈에 담고 트라팔가 광장(Trafalgar Square) 근처로 갔다.

웨스트민스터 사원과 빅 벤, 아직 시계탑 보수 공사 전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영국 왕실의 사원으로 역대 왕들의 대관식이나 장례식 등 왕실의 주요 행사가 치러지는 곳이다. 전형적인 고딕 양식의 성당으로 어느 면에서 마주해도 아름답다.

런던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흔히 ‘빅 벤’이라고 불리는 이 건물은 웨스트민스터 궁전으로 현재는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2006년 여행 때는 보수 공사를 하는 곳이 없어서 템즈강 건너편에서 밤이고 낮이고 예쁜 자태를 감상했는데 이번 여행에서는 보수 공사로 가려진 부분이 있어 약간 아쉽긴 했다. 2021년까지는 시계탑 보수 공사로 인해 종을 울리지 않을 예정이라고.

잠시 스쳐 지나간 트라팔가 광장과 내셔널 갤러리



사실 비만 적당히 와줬다면 이 날은 꼭 찾아가고 싶은 미술관이 있었다. 여행 전체 예산이 워낙 빠듯해서 데이터 로밍은 엄두도 못 내고 숙소에서 공짜 와이파이만으로 현지 정보를 검색하고 지인들과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심지어 한국과의 시차로 그나마도 원활하지 않았던 상황. 그 와중에 이날 아침 친구로부터 연락이 왔다. 런던을 자주 다니고 잘 아는 지인이 있는데 아직 런던이라면 내셔널 갤러리 근처에 있는 ‘토우터드 미술관’을 꼭 가보라고 추천했다는 것이다. 좀 미리 알려줬으면 제대로 찾아보고 왔을 것을, 아침 미사 시간은 다가오고, 숙소를 나서면 문명에서 벗어나 원시인이 되어버리니 더 이상 검색도 할 수 없고 결국 미술관 이름 하나 적어서 무작정 찾아가 볼 작정이었다.


그래서 트라팔가 광장까지는 왔는데 비는 잦아들 생각을 않고, 일단 비를 피하러 들어간 스타벅스에서 공짜 와이파이에 힘입어 미술관 위치를 찾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떻게 검색을 해도 ‘토우터드 미술관’은 나오질 않았다. 한국어로도 찾아보고 소리 나는 대로 최대한 머리를 굴려 이런저런 영어 철자를 넣어서 찾아봤지만 그 비슷한 미술관도 없었다.


엄청난 모험이 펼쳐질 것 같아서 두근거리던 마음은 무심히 쏟아지는 비와 부정확한 정보 때문에 한순간 축 처져버렸다. 커피를 한 잔 시키고 창밖을 보고 있자니, 이미 비는 흠뻑 맞아 몸도 노곤한데 그냥 커피 마시면서 비 구경이나 할까? 내가 파리에서 루브르, 오르셰도 봤고 로마에서 바티칸도 갔었는데, 서유럽의 웬만한 유명한 미술관은 다 가본 사람인데! 이런 검색도 안 되는 작은 갤러리 하나쯤 안 봐도 되지 않을까? 이런 게으른 생각들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카페에서 쏟아지는 비를 보며 망연자실

엎어진 김에 쉬어 간다고 오늘은 숙소 근처에서 맛집 탐방이나 해보자!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구글 지도에서 찾을 수 있는 근처 관광지 중에 이전에 가보지 않았던 곳을 한 군데만 들르고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선택된 곳이 서머셋 하우스(Somerset House)! 한창 도시와 건축에 매료되었던 어린(?) 시절 학교 도서관에서 읽었던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세계 건축 1001’ (마크 어빙, 피터 S.T. 저, 마로니에북스, 2009. 1. 20.)이라는 책에서 얼핏 이름을 본 기억이 있는 이 건물은 처음부터 공공 건축물로 지어져 과거 수백 년간 영국 왕실과 귀족을 위한 시설로 이용되었으며 웅장한 자태로 템즈 강변을 장식하고 있다.


사실 도착하기 전까지도 서머셋 가문의 저택 정도로 추측만 했던 이곳은 현재 미술, 음악, 영화 등 다양한 전시가 열리는 문화 시설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외부에서 건물만 보고 가려던 나는 이곳에서 내 인생 미술관을 만나게 되었다.

건물 규모도, 전시장 규모도 상당하다

미술관이 있길래 일단 입장료나 알아볼까 하고 매표소 앞에 섰다. 매표소에 적혀 있는 입장료가 꽤 비쌌는데 오늘은 무료란다. 미술관이나 전시의 성격도 알 수 없었지만 일단 공짜라니 들어가 볼까? 영어로 이유를 물어봐도 어차피 돌아오는 답변을 알아듣지 못할 게 뻔하니 이유도 묻지 않고 그저 땡잡았다 생각하고 들어갔는데 여기에 진짜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인상주의의 정수와 같은 작품들이 모여 있었다.

이 정도는 맛보기

그냥 여기 있는 작품만으로 미술 교과서를 채울 수 있을 정도라고 생각하면 쉬울까? 루벤스 (Peter Paul Rubens), 드가 (Edgar Degas), 르누아르 (Pierre-Auguste Renoir), 모네 (Claude Monet), 고갱 (Paul Gauguin), 마네 (Edouard Manet), 고흐 (Vincent van Gogh), 세잔 (Paul Cezanne), 앙리 마티스 (Henri Matisse), 칸딘스키 (Wassily Kandinsky), 피카소 (Pablo Picasso) 초기 작품까지!! 이건 뭐, 내가 왜 여기를 이제야 알았을까 스스로가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어떻게 이렇게 잘 모아놨지?

입장료가 공짜라고 좋아할 게 아니라, 입장료가 얼마든 몇 번이라도 가야 할 大미술관이 아닐 수가 없다.

미술을 잘 아는 건 아니지만 내가 사랑하는 화가는 다 있었던 듯

밀려오는 감동에 어쩔 줄을 몰라서 실실 웃다가 울다가 중얼거리다가, 홀린 듯 감상하면서 몇 시간을 그렇게 그 안에서 보냈다.


이 미술관 이름은 코톨드 갤러리(The Courtauld gallery)로 와이파이가 끊기기 전 친구가 꼭 가보라고 한 그 미술관이 바로 이곳이었다.

친구의 지인으로부터 친구를 거처 나에게 전해지면서 미술관 이름이 Courtauld -> 코우터드 -> 토우터드 로 바뀐 것이었다. 그렇게 찾으려고 할 때는 도무지 알 수가 없더니(이름을 잘못 알고 있었으니 찾을 수가 있었을 리가 없지) 결국엔 예상하지도 못했던 곳에서 선물처럼 만나게 된 것이다.


애초에 미술관 이름 하나만 달랑 들고 모험을 하려는 결심을 하지 않았다면? 쏟아지는 비에 트라팔가 광장 근처까지 오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면? 스타벅스에 앉아서 그냥 숙소 근처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면? 딱 한 곳만 들렀다 가자고 한 그곳이 서머셋 하우스가 아니었다면? 사소한 순간의 선택과 우연들이 겹친 작은 사건이었지만 나는 여기에 또 그렇게 의미를 부여하며 하루 종일 감동에 젖어 있었다.


여행이란 그래서 특별한 것이 아닐까,

누군가에게는 일상적인 사소한 일도 여행 중에는 엄청난 사건으로 기억되니까.



감동적인 미술관 관람을 마치니 거센 비도 좀 잦아들었고 마음 같아서는 폐관할 때까지 있고 싶었지만 그래도 일요일이니 마켓을 한 군데 더 구경하고 싶었다. 부슬부슬 안개비를 뚫고 근처에 있는 코벤트 가든 마켓(Covent garden Market)으로 향했다. 이 마켓은 거대한 중정형 시장으로 다른 지역의 시장과는 달리 제대로 건물을 갖춰 무엇보다도 비를 피할 수 있었다.

어쩐 일인지 셰이크 쉑 버거로 더 유명한 코벤트가든 마켓

건물 구조를 갖춘 곳이라서 그런지 시장이라고 하기엔 꽤나 고급 브랜드도 들어와 있었고 바로 맞은편에는 플리 마켓이 열리는 이색적인 풍경이 펼쳐졌다. 그리고 이곳에는 그 유명한 셰이크 쉑 버거(Shake shack burger)가 있다. 뉴욕이 본점인데 런던에서 꼭 먹어봐야 할 맛집(?)으로 소개되는 걸 보면 런던에 맛집이 그렇게도 없나 싶기도 하고 그 당시 우리나라에 셰이크 쉑이 들어오기 전이라서 더 그랬나 싶기도 하다.



마켓에서 나와서 정처 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대형 쇼핑몰과 웬만한 브랜드의 편집샵이 늘어서 있는 Oxford Street이다. 일요일이라서 그런지 특별한 축제 기간인지 자동차 통행을 다 막고 작은 공연들과 다양한 판촉이 진행 중이었다. 작정하고 쇼핑을 하러 간 건 아니었기 때문에 그저 그 분위기를 느끼며 거리를 한참 누볐다.

비가 오고 스산하지만 축제는 축제


그러다가 문득 다시 만난 버킹엄 궁전(Buckingham Palace). 9년 전 이곳에서 근위병 교대식을 보던 어린 내가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났다. 내가 그리운 건 그 근위병 교대식이었을까, 그저 그때의 나였을까?

역시나 많은 관광객들이 모이는 곳


사진만 잠깐 찍고 이제 비를 더 맞으면 앞으로 남은 여행이 엉망이 될 것 같아서 바로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숙소로 가는 길은 최대한 관광객이 없는 곳으로 가고 싶다며 작은 골목으로 들어섰는데 모퉁이에 있는 이 기념품 가게, 뭔가 낯이 익다? 9년 전 런던을 떠나며 남은 파운드화를 소진하겠다고 들른 바로 그 가게였다. 그때 이 가게에서 궁정 근위병 모양의 볼펜을 하나 사서 여행 내내 일기도 쓰고, 엽서도 쓰고 분신처럼 가지고 다녔는데 그 볼펜은 지금 어디에 있더라?

위 사진은 9년 전, 아래는 이번 여행. 오랜 시간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어 좋았다


별생각 없이 우연히 들어선 곳에서 매번 신기한 경험을 한 잊지 못할 하루.


그리고 마무리는 예전 그날처럼 템즈강 맞은편에서 빅 벤을 보며 맥주 한 병!


이대로 하루를 마무리하기 아쉬워 다시 찾은 템즈강변에서


여행에는 역시 맥주가 빠질 수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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