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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잔하게 May 27. 2024

하루의 무게 따위 너는 모른다고


“시간이 절박하게 느껴질 때가 있어. 어떤 일을 해보자고 제안받을 때 나도 모르게 생각하게 되는 거야. 한 달 혹은 두세 달, 그 일에만 매달려도 괜찮은 걸까? 그 사이에 내가 너무 많은 일을 놓치게 되는 건 아닐까? 그래서 더 뒤처지게 되는 건 아닐까? 근데 막상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지나고 보면 잠깐이거든. 뭐 대단한 일이 일어나지도 않았고, 엄청난 손해를 본 것도 없거든. 그런데도 엄청난 결단을 내려야 할 것처럼 항상 고민하는 거야. 아니 그건 걱정이지. 조급한 거지, 그냥. 불안한 거지.”


친구와 산책하던 길에 나도 모르게 줄줄이 새어 나오던 말을 곱씹는다. 하루하루의 무게를 일일이 느끼게 된 건 언제부터였을까? 한 달이면 하루가 30개 혹은 31개. 나에겐 너무도 큰 무게이고 단위여서 결단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 하루를 지나치게 촘촘히 살려는 사람이 겪는 부작용일지도 모르겠다. 분 단위의 계획 안에 하루치의 나를 바닥까지 전부 다 소모하지 않으면 죄책감이 느껴진다. 이상한 일이다. 생각해 보면 과거의 나는 계획형 인간도 아니었다. 예정에 없던 일이 일어나는 것을 싫어했고, 최소한의 동선으로 일을 해치우려는 약간의 강박을 갖고 있기는 했지만, 극단적인 귀차니스트였기에 언제나 귀차니즘이 이겼다. 계획이라는 것도 무한한 자유와 시간 속에서 존재함을 인지할 정도만 허용됐다. 하루에 하나 혹은 두 개쯤. 성공하기 어렵지 않고 실패해도 신경 쓰이지 않을. 지금도 그렇지만, 그 시절에도 대책 없이 걸어 다니는 일을 가장 좋아했다. 대형 서점에 가서 아무 계획도 없이 2시간씩 돌아가니거나, 도서관에 공부를 하러 나섰다가 갑자기 방향을 틀어 영화를 보러 간다거나. 단골 카페를 만들겠답시고 근처에 있는 카페를 이상한 기준으로-하필 내가 지나갈 때 문을 열었다거나, 매장 안에 있는 시계가 노란색이라거나- 투어 하고, 집 앞에 다 와놓고는 갑자기 마음이 바뀌어 피시방으로 홱 돌아서 가버린 적도 적지 않다. 지금의 나로서는 좀처럼 허용하지 않을 일이지만, 여전히 내 안에는 그때의 내가 살아있다. 루틴맨의 생활이 가끔 갑갑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 시절의 내가 잔소리를 퍼붓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하루를 대충대충 살면 좀 어떠냐고. 1분 1초를 다 감각하고 인지하며 살다가는 미쳐버리거나 일찍 죽게 될 거라고. 하루의 무게 따위 재본 적도 없으면서 아는 체하지 말라고, 재수 없다고. 나답게 퍼붓고, 기어이 침대에 주저앉힌다.




2024. 05.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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