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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잔하게 May 26. 2024

내가 좋아하던 우리 동네


나는 30년 넘도록 서장대를 마주 보며 살았다. 이 말은 내 인생 전반에 걸쳐 화성행궁이 자리한다는 뜻이다. 세계 문화유산이니 행리단길이니 여러 이유로 유명세를 탔지만, 내게는 그저 앞산이고, 동네 산책길이고, 출퇴근 길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살던 동네가 얼마나 특별했는지는 먼 곳으로 이사를 와서야 알았다. 버스를 타면 40분 정도. 이사를 온 후에도 한동안은 매일 같이 도장을 찍어서 실감하지 못했다. 내 몸과 생활반경이 버스로 40분 떨어진 곳에 위치했어도 나는 여전히 그곳에 살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태어나면서부터 사춘기와 20대의 방황기를 보냈던 곳.


한동안 발길을 끊고 난 뒤 다시 가보았더니 그곳은 아주 모르는 곳이 되어 있었다. 타지에 사는 친구들이 나를 믿고 행궁동에서 약속을 잡았어도 오히려 내가 그들에게 의지하여 식당도 가고 카페도 가야 할 지경이었다. 길치에 방향치인 탓도 있겠지만, 도통 살펴본 적이 없는 탓이다. 아침저녁으로 지나던 길 안쪽으로 그리도 예쁘고 맛 좋은 음식점이 있는지를 몰랐었다. 행궁의 사대문을 수시로 드나들며 역사의 현장을 바로 옆에 두고 모르는 것이 말도 안 된다며 일부러 시간을 내어 행궁을 돌기도 했지만 별반 나아진 구석은 없었다.


화성에는 네 개의 문루가 있는데 그중에서도 동문인 ‘창룡문’이 내 생활 반경에서 가장 먼 곳이었다. 오늘 우연찮은 기회로 그 근처를 걷게 됐다. 정확히 말하자면 북문과 동문 사이에 위치한 방화수류정 길을 걸었는데, 남문은 뻔질나게 드나들었어도 이편으로는 걸음 한 적이 별반 없던지라 더욱 생소하게 느껴졌다. 며칠 전 독서모임을 다녀왔던 홍대만큼의 인파까지는 아니었어도 충분히 많은 사람들이 산책을 하고, 데이트를 하고,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무리 지어 다녔다. 동행했던 친구는 “너 선재 업고 튀어 보냐”며  바로 여기서 촬영한 거라고 알려주었다. 그때부터 이 장소는 ‘책가방 없는 날’마다 의무적으로 가야 했던 장소가 아니게 되었다. 나는 전혀 모르는 도시에 이제 막 도착한 사람처럼 주변을 돌아보았다. 주차장 철창에 가득 매달려있는 장미꽃도, 아기자기한 카페들도, 야외 테이블에 앉아 통닭을 먹고 있는 사람들도 모두 새롭기만 했다.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 우리도 다수 중 하나로 섞여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북문에서 식사를 하고 다시 남문으로 걸었다. 나도 친구도 딱 적당한 만큼 술을 걸친 터라 기분이 매우 좋은 상태였다. 술을 마시면 커피를 찾는 버릇이 있는데(건강에 매우 나쁘다고 한다) 친구가 먼저 커피를 마시자고 해서 반가웠다. 밤 9시가 넘었는데도 사람이 여전히 북적거렸다. 친구가 가본 적 있다는 카페에 들어가 늘 먹던 커피를 테이크아웃 하여 남문 쪽으로 걸었다. 바람이 좋았고, 날도 선선했다. 커피는 달았고, 기분은 자꾸자꾸 좋아졌다.


“나 이걸 좋아했던 것 같아.”


입 밖으로 뱉고 나니 잘못된 문장이라는 걸 알았다.


“나 이걸 그리워했던 것 같아.”


지금 이 자리에 없는 친구들의 얼굴이 잠시 떠올랐다. 당연한 것처럼 뭉쳐서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커피 한 잔을 사서 목적지도 없이 걸어 다니던 우리를. 우리는 왜 지금 여기 다 같이 있지 않은 걸까. 커피는 달았고, 오늘 하루는 완벽했다. 그런데도 채워지지 않는 구멍이 남아있는 건 내가 욕심이 많기 때문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2024. 05.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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