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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잔하게 Oct 25. 2024

더울 때는 늦어요, 패딩 입고 만나요


터미널에 도착하는 시간은 언제나 이르다. 병적인 불신감 때문에 느긋해질 수가 없다. 발매된 티켓을 보면서도 제날짜, 제시간에 제대로 예약한 게 맞는지 몇 번이나 들여다봐야 하고, 그 안에 버젓이 적혀있는 플랫폼으로 가면서도 이곳에 정차하는 버스를 타는 게 맞는지 좀처럼 확신하질 못한다. 검표를 마치고 내가 늘 선택하는 자리에 앉았으면서도 상태는 나아지지 않는다. 문제가 있었으면 기사가 그냥 지나치지 않았을 거라는 믿음과 혹시 그가 발견하지 못한 거면 어쩌지 하는 불신이 정신없이 뒤엉킨다. 버스가 출발하고 나서야 점점 안정을 찾기 시작하는데, 이미 출발해버렸으니 어쩔 수 없다는 체념의 마음이 즉효 약처럼 작용한다. 어쩔 수 없는 일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놀라울 정도로 대범하고 무심하다. 이 버스가 어디로 도착하든 어쨌든 버스터미널일 것이고, 그곳에서 바로 집으로 돌아오는 표를 사면 이 일은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그 사실이 나를 안심시킨다. 혹 그때에도 일이 잘 안된다면 가족에게 도움을 청하면 된다. 내가 이런 일로 진지하게 도움을 요청하면 다들 으이구, 하면서도 결국은 와줄 것이다. 그제야 나는 긴장을 풀고 좌석에 편히 몸을 기댄다. 낯선 버튼을 조심조심 만져가며 등받이와 발받침의 기울기를 조절해 본다. 버스는 목적지가 아닌 곳에 도착한 적이 없다. 경험을 토대로 확실한 사실을 획득하며, 비로소 자신의 불안을 통제할 수 있는 위치에 올라선다. 긴 여정이 시작되기 전에 마쳐야 하는 이 정신적인 여정으로 나는 버스가 출발할 때부터 이미 녹초가 된다. 그럼에도 떠나기를 그만두지 않는 이유는 오로지 목적지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 때문이다. 그 사람을 발견하고 다급히 뛰어가는 나의 허물어진 표정 때문이다. 그곳에 나의 완전한 진심과 기쁨이 휘몰아치기 때문이다. 나는 거추장스러운 육신을 밀며 도시의 경계를 넘는다. 나의 몸이 정신과 합치되는 지점을 향해 손을 뻗는다. 주먹을 펴지 않는 버릇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어제는 당진을 다녀왔다. 그리웠던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각자에게 겨우 주어지는 휴무를 이리저리 맞춰가며 간신히 날을 잡았다. 오랫동안 기다렸던 만남이라 2주일 전부터 내내 설렜다. 설레발이 지나친 게 문제였던 걸까. 정작 당일엔 버스 시간을 착각하는 어이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수원에서 당진으로 가는 버스는 10시 10분에 있었는데, 나는 너무도 당연하게 10시 30분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다음 버스는 13시가 넘어서 있었는데, 남아있는 좌석이 없었다. 잠시 패닉 상태가 된 나는 부랴부랴 다른 방법을 찾았다. 인천까지 가서 버스를 타야 하나, 지도앱이 보여주는 경로를 보며 막막하게 고민하다가 수원 버스터미널에서 바로 갈 수 있는 방법을 발견했다. 운산으로 가는 것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곳을 목적지로 두어야 하는 상황 그 자체만으로도 나는 어마어마한 불안감에 휩싸이며 숨이 꽉 막혔지만, 그 길이 가장 빠른 길이었다. 운산 정류소에서 당진터미널까지는 버스로 십여 분 정도만 이동하면 됐다. 생판 모르는 지역에서 낯선 버스를 딱 한 번만 더 타면 된다. 그러면 본래의 예정대로 도착할 수 있었다. 어이없게도 운산으로 가는 방법은 평소보다 30분 이상을 단축할 수 있는 경로였다. 목적지를 운산 정류소로 바꿀 수 있다면 말이다. 나 같은 경우는 만나기로 한 일행에게 운산 정류소든 당진터미널이든 큰 차이가 없었다. 다행이다. 버스를 놓친 덕에 새로운 경로를 알게 되었다며 허허 웃으며 떠들었지만, 일행의 차가 운산 정류소로 도착할 때까지는 심장이 쪼그라들어서 아플 정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운산 정류소는 편의점 앞에 있다. 편의점 입구 옆에 버스 정보 계기판이 없었더라면 그곳이 정류장인지도 몰랐을 것이다. 버스 매표소는 모퉁이를 돌아야지 발견할 수 있다. 초조한 마음에 종종거리며 오가지 않았더라면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맞은편 차선에서 달려오던 차가 서서히 속도를 늦추더니 창문 밖으로 사람들이 손을 내밀어 흔들었다. 그 안에서 낯익은 얼굴들이 하나 둘 튀어나왔다. 내 이름을 돌림노래처럼 불러주었다. 그제야 나는 마음놓고 헤실거리며 차도를 건너 뛰어갔다.


허겁지겁 배를 채우고 이동한 곳은 오래된 미래였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모였으니 당연한 행선지였는지도 모르겠다. 독서모임을 멈춘 후 다 함께 서점 안에 있는 일은 정말 오랜만이어서 제3의 눈이라도 달린 것처럼 아주 새삼스럽게 우리의 모습을 보곤 했다. 우리는 아기자기하고 다정했다. 신간도서를 보며 알은체하고, 읽은 책을 꺼내어 소개해 주고. 머리를 맞대고 서서 그림책을 함께 읽기도 하면서, 감탄하고 속상해하고 좋아하고 폭소하면서. 그러는 와중에도 구매할 책들을 꼼꼼하게 골라보면서 한참이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오래된 미래는 다양한 책들이 많이 구비되어 있어서, 내부를 둘러보는 데만 해도 긴 시간이 걸린다. 특히 나 같은 경우는 취향에 맞는 도서가 정말 많아서, 갈 때마다 눈 둘 곳을 모르고 몇 바퀴나 돌고 또 도는지 모른다. 눈에 잘 안 띄는 구석까지도 예쁘고 단정하게 꾸며진 곳이 많은데, 사장님 내외분께서 건물의 대부분을 직접 수리하시며 만들어오신 공간이라는 걸 생각하면 이 공간에 얼마나 많은 애정이 쌓여있는지를 담뿍 느낄 수 있다. 우리는 그 애정 위에 발자국을 포개고, 손의 지문을 겹쳐보면서 애정의 더께를 더해가는 것이겠지. 2층 공간에 발을 들일 때마다 감탄하는 동시에 안락함을 느끼는 이유는 그 때문인 것 같다. 손끝으로 조심히 책장을 넘기는 태도가 책을 대할 때만이 아니란 걸 알게 되는 것도 그곳을 꼼꼼히 들여다볼 때이다.


책방에서 조금 올라가면 미인상회가 있는데, 당진에 올 때마다 거의 필수적으로 들리는 코스이다. 이곳에서 글씨도 쓰고, 수다도 떨고 했다. 책도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음료도 디저트도 예쁜 만큼 맛도 좋아서 뭘 시켜도 실망할 일이 별로 없다. 나는 늘 관성적으로 카페라테를 시키는 편인데, 미인상회는 그 선택을 뒤늦게라도 후회하게 만드는 몇 안 되는 카페 중 하나이다. 이날은 일행에게 장미에이드를 추천받았다. 장미와 에이드라니. 좀처럼 매치를 못 시키고 있던 터에, 맛을 보라며 본인의 음료를 권해주셔서 한 모금 마셔보았다. 말끔하면서도 달콤한 그 맛이란. 눈이 동그랗게 뜨일 정도여서 다음번엔 꼭 장미에이드를 먹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미인상회는 일제강점기 때 지어진 우체국 건물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공간이다. 그래서인지 내부로 들어설 때마다 과거 속 공간으로 틈입하는 것 같은 실없는 상상이 돋아나기도 한다. 다른 일행들은 구석구석 감성적인 인테리어에 꽂혔다. 이런 곳에서는 책 사진을 찍어야 한다며 책과 휴대폰을 주섬주섬 꺼내는 걸 보니 저절로 웃음이 터졌다. 내 사진도 아니고 책 사진이라니. 누가 책 좋아하는 사람들 아니랄까 봐.


마지막 코스는 아미미술관이었다. 나는 이미 방문한 적이 있는 곳이었는데도 맑은 날에 왔다는 이유만으로 처음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우산 없이 둘러보는 아미미술관은 또 다른 재미가 있었다. 양손이 자유로워서, 담고 싶은 장면들을 바로바로 카메라에 담을 수 있다는 점도 큰 장점이었다. 덕분에 미술관을 둘러싼 계절의 선명한 빛깔들을 하나 둘 수집해올 수 있었다. 붉은 단풍과 마른 낙엽과 싱싱한 넝쿨과 창백한 수국에 일일이 찬사를 보내며 나란히 발을 맞추는 시간은 얼마나 흐른 대도 바래지 않을 것이다. 실내 전시장에서는 당진의 포구를 주제로 5명의 작가들이 작품을 전시하고 있었다. 한지민 작가님의 작품만 알고 입장한 것이었는데, 다른 작품들에도 시선을 뺏겨 정신이 없었다. 마음으로 뛰어드는 작품이 많았다. 세찬 물살에 하릴없이 실려가면서 목이 꺾여라 뒤를 돌아보는 기분이 이런 것일까. 다급한 마음에 손을 휘저었다간 잡히는 족족 내 얼굴이고.


5시가 되어 서울에서 온 일행 두 명이 버스를 타고 떠났다. 나는 8시 차였다. 그렇게까지 오래 있으려던 건 아닌데 그전에 있는 차표가 모두 매진이어서 선택지가 없었다. 당진에 사는 일행이 긴 시간까지 함께 있어주었다. 그도 피곤했을 텐데, 시간을 많이 뺏은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함께 먹은 파스타와 샐러드는 너무 맛있었고, 커피 맛도 끝나지 않는 우리의 대화도 속없이 좋기만 했다. 당진의 밤 풍경이 처음은 아니었을 것 같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어둡고 찬 공기를 품고 있는 당진의 밤은 생소해서 또 다른 여행지로 이동해온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버스 안에서는 정신없이 졸았다. 터미널에서 집으로 가는 길은 아주 멀게만 느껴졌다. 그도 그럴게 어깨가 너무 무거웠다. 빈손으로 돌아올 것을 계획하지만 빈손으로 보낸 적이 없는 사람들 덕분에 내 몸은 불균형이 되어간다. 왼쪽 어깨가 귀까지 올라오면 어쩌지 하며 가방을 추켜올린다. 어깨는 모르겠고, 우리가 한 말이나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서로에게 건넨 마지막 인사를 곱씹는다. 더울 때는 안 돼요. 그건 너무 늦어요. 우리는 추울 때 봐야 해요. 꼭 패딩 입고 만나요.

꼭 패딩을 입고 다시 만났으면 좋겠다.

그날까지, 우리 모두 안녕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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