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잔잔하게 Oct 25. 2024

눈 뜨고 처음 귀로 듣는 말, 입 밖으로 내는 말


아침엔 좋은 말을 귀에 담고자 노력한다. 발라드 곡의 특정 가사를 알람으로 해놓았던 것도 그 때문이다. ‘너에게 닿으면 얼마나 좋을까’라거나 ‘아프지 마요 외롭지 마요’ 같은 노래를 기상 알림으로 해두면 하루를 느긋하게 시작할 수 있다. 원하는 부분까지 노랫말을 들으려고 버티는 동안 잠도 깨고, 하루를 시작해 볼 마음도 생긴다. 알람의 첫음이 울리자마자 깨거나 그전에 이미 정신이 들어와 있는 나에게 알람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한 비상수단일 뿐이다. 요란한 필요도 없고, 사실 요란한 쪽이 내게는 더 좋지 않다. 귀를 때리는 듯한 소리로 정신이 깨면 불쾌감만 든다.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로 하루를 여는 건 특별한 사람들이 가지는 특권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자신의 힘으로 시도해 볼 만한 것이고, 가능하다면 해보는 게 좋다. 이제 어느 누구도 나의 엉덩이를 두드리거나 뺨에 입을 맞추거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나를 깨우지 않는다.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나이는 한참 지났지만, 애정의 손길이 닿았던 자리는 손자국이 남아있다. 그곳에 새로운 지문에 새겨지지 않는 일에 대해 위화감을 느낄 때가 있다. 자신의 몫이었던 다정함을 잃은 기분. 개인이 받아야 할 애정에 총량 같은 건 없지만, 처음부터 없었으면 모를까 있었다가 없어진 것에 대해서는 아쉬움을 느끼게 마련이다. 아쉬움은 크다. 자신의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던 건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한때는 내 것이었던 애정이 더는 내 것이 아니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런데 나는 여전히 애정받아 마땅할 존재라는 걸 기억했기에.


귀에 들리는 첫마디를 신경 쓰는 만큼 입 밖으로 내는 첫마디도 주의를 기울이는 편이다. 한때는 오늘 내가 뱉은 첫말이 하루를 결정한다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스스로 만드는 족쇄 같아서 그만두긴 했지만, 꽤 오랜 시간 그런 믿음을 가지고 좋은 말 뱉기를 실천해왔다. 말을 고르고 고르다 보니 말수가 줄어드는 단점이 있었다. 타인에게 건네는 첫 말을 카운트했기 때문이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 노랫말보다 부드러운 음성으로 안녕, 잘 잤어? 좋은 하루 보내자 같은 말을 주고받는다면 그보다 더 황홀한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침에 사람들은 대체로 바쁘고 기분도 다운되어있다. 잠을 물리치고 촉박한 시계에 맞서 가며 막막한 하루에게 억지로 덤벼서 싸워야 하는 그들에게 아침이란 듣기 싫은 알람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타인의 기분에 내 하루의 기분을 맡겨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나는 잠에서 깨서 5분이고 10분이고 천장이나 창밖, 벽 등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때 나 자신을 위해 신중하게 고른 첫마디를 뱉는다. 주로 ‘좋았어!’, ‘가볼까?’, ‘해보자’, ‘내가 이겨!’ 같은 말들이다. 이미 오늘을 결정할 말을 내가 해버렸기에, 이후로는 어떤 말을 해도 상관없다. 형체 없는 하루를 원하는 모양으로 빚어가면 그만이다. 물론 그 또한 만만치는 않겠지만, 세상에 만만한 일이 뭐가 있을까. 능력껏 할 수 있는 만큼 해보는 수밖에.


하루의 목표는 생각보다 거창하지 않다. 자신이 부끄럽지 않은 정도의 성취율을 달성하기만 하면 된다. 자신에게 완벽함을 기대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완벽한 인간을 추구하다가 완벽하게 망해버린 경험만 늘렸기 때문이다. 눈 뜨고 처음 귀에 듣는 말과 입 밖으로 내는 말. 그 정도를 뜻대로 하는 일만으로도 충분하다. 작은 성취감으로 여는 하루는 유리하다. 적어도 두 번 정도는 덜 꺾일 수 있다. 그건 두 걸음 정도 앞서 나갈 수도 있다는 말이다. 소소한 목표들을 많이 만들어야 한다. 작은 돌멩이에 불과한 일들이 나의 보폭을 키울 것이다. 커다란 웅덩이를 만나도 여유롭게 건널 수 있을 만큼 크게 걷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이전 12화 기분에 속아 스스로를 미워하지 않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