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섶 6월 독서모임을 다녀와서
자신의 생김새를 받아들이는 일은 의외로 쉽지 않다. 아침저녁으로 매일 들여다보는 거울에도 왜곡된 렌즈가 달려있다. 매일 왜곡된 상을 접하기에 새로운 모습을 보게 되면 당황한다. 그것이 실체라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쉽사리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녹음된 내 목소리를 처음 듣던 날의 충격을 기억한다. 어린 나이에도 카세트가 잘못된 거라고 합리화를 하고 못 들은 척할 만큼 충격적이었다. 성우공부를 하겠다고 스스로 학원을 찾아갔던 일은 그런 면에서 보면 기적 같은 일이었다. 우주가 충돌하는 확률과 맞먹을지도 모른다. 혼자서도 듣기 괴로운 나의 음성파일을 다른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듣고, 교정받는 일은 괴로웠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그 역시도 적응이 되긴 하더라고. 괴로움의 크기가 줄어들지는 않았지만 체념의 깊이가 깊어져서, 그러려니, 뭐 어쩌려니 하며 넘길 수 있게 되었다.
못생기게 나온 단체 사진도, 영상 속 내 모습도 덩달아 체념할 수 있게 된 건 뜻밖의 수확이었다. 타인의 카메라 앞에 서는 건 여전히 불편하고 꺼림칙한 기분이 들지만, 전처럼 질색하며 달아나지는 않는다. 이는 영상기록을 남기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생긴 변화이기도 하다. 내가 행복했던 순간에 함께 해주었던 이들을 예쁘게 담고 싶어서 시작한 영상 만들기는 긴 시간에 걸쳐서 나의 습관도 관점도 루틴도 다양하게 바꾸어놓았다. 그중에 하나는 영상 혹은 사진에 찍힌 내 모습을 꼼꼼히 들여다보며 나에 대해 하나씩 더 배우는 일이다. 나는 중요한 이야기를 꼭 두 번씩 하는 버릇이 있고, 사진을 찍을 때 꼭 턱을 치켜든다. 무의식 중에는 턱살이 접히도록 목을 접고 있는데, 땅을 보며 걷는 오랜 습관 때문이 아닌가 싶다. 비대칭은 점점 더 심해져서 억지로 웃을 때면 세상에서 가장 못생긴 얼굴이 되고, 진심으로 활짝 웃을 때는 주름이 만개한다.
이런 모습이 예쁠 리 없다. 하지만 그 모습이 내 모습이 아닐 리도 없다. 이것도 나야! 하고 기록으로 남겨두기에는 셀(카사)기꾼으로 살아온 시간이 너무도 길어서 잘 되지 않지만, 그 사진을 아무도 볼 수 없는 방식으로 폐기하면서도 그게 나라는 걸 한 번씩 더 인지한다. 그러다 보면 남이 찍은 내 사진도 조금은 여유를 가지고 볼 수 있다. 그 사람이 나를 찍을 때 반복적으로 붙잡아두는 나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면 신비로운 진실을 하나 알게 되는 것이다. 내가 한 사람의 눈에 어떻게 비치고 있는지를.
요즘은 그런 나를 찾는 일에 집중하고 있다. 그것은 내가 기록할 수 없는 나의 모습일 테니까. 만날 때마다 틈틈이 내 모습을 찍어주는 친구들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늘 감사하고 있다. 그들이 쓰는 카메라에 셀기꾼을 위한 왜곡 렌즈를 은근슬쩍 붙여놓고 싶은 마음을 애써 누르며.
자신의 생김새를 더욱 잘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