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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잔하게 Oct 25. 2024

기분에 속아 스스로를 미워하지 않기



하루를 정리할 때마다 그날의 점수를 매긴다. 회고할 때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부분이다. 온종일 있었던 일을 돌아보면서 그날의 무드는 어땠는지, 나의 만족감은 어땠는지 스스로 평가하고 기록해둔다. 이 기록을 모으면 한 주의 평가가 가능하다. 한 주의 평가가 모이면 한 달이, 한 달이 모이면 일 년을 자신이 얼마나 만족스럽게 살아왔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문제는 평가의 기준이다. 그날 내가 얼마나 즐겁고 행복하고 만족스러웠는지는 나만이 아는 문제이다. 전적으로 나의 주관을 바탕으로 하기에 그날의 기분, 기록을 작성할 때의 기분 등에 큰 영향을 받는다. 게다가 나는 점수는 낮게 주는 경향이 있다. 평균보다 낮은 지점에서 안정감을 느끼는데다 언제나 여유를 조금 남겨두는 성향이 점수에도 반영된 것이다. 쉽게 말해 5점 전후에서 크게 변동되지 않는다. 2점까지 떨어지는 날은 더러 있지만 9점까지 올라가는 날은 거의 없다. 10점은 찾아보기도 힘들다. 이런 기록들이 쌓이면 언제나 평균5-6점의 일주일을 사는 사람이 된다. 좋았던 날들도 평균 점수에 묻혀 절반의 행복이 되어버린다. 그러잖아도 8점 이상의 날들을 만나기 힘든데, 기껏 좋았던 날도 점수가 깎이다니. 그보다는 4점짜리 하루가 7점으로 둔갑하는 것이 낫지 않은가. 평가 기준에 대한 고민하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쓰레기처럼 보냈네, 같은 생각을 자주 하는 편이었다. 그림을 제대로 그리지 못하는 날에는 자신이 미친놈이나 형편없는 망나니, 빌어먹을 영감탱이라는 생각이 든다던 고흐처럼 원하는 만큼의 글을 써내지 못하면 자신이 불필요한 찌꺼기 같아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스스로를 향한 비난을 끝도 없이 늘어놓고 있었다. 그러다가 매일 컴퓨터를 끄기 전에 하듯이 엑셀 파일을 켜서 작업량을 기록했다. 그날은 31일이었고, 내가 막 숫자를 기입한 31일 칸 밑에는 합계된 수치가 기록되어 있었다. 93915. 처음엔 그 숫자가 뭘 의미하는지 잘 이해되지 않았다. 93915. 얇은 책 한 권을 만들 수 있을 만한 분량. 데이터가 눈앞에 떡하니 있으니 더는 자신을 헐뜯을 수도 없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멍청이라고 하기에는 이미 너무도 많은 글자를 써낸 탓이다.


그날의 경험은 기록을 열심히 하면 스스로 무너지는 자신을 구할 수 있다는 교훈을 남겨주는 동시에 객관적인 데이터를 쌓는 일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주었다. 수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건 의심할 수도 없는 확실한 답을 주었다. 숫자처럼 명확하지는 않더라도 기분 같은 애매한 기준에선 탈피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러다가 떠올린 것이 공중화장실 안에 붙어 있는 점검표였다. 정수기 근처에서도 비슷한 걸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담당자는 코팅된 평가지 위에 검은색 마커펜으로 점을 찍어 자신이 점검할 당시의 상태를 표시해두었다. 점 찍는 방식이 다르거나 표시 기호가 바뀌는 걸 보면 한 사람이 전담하는 일은 아니었다. 누가 와서 체크해도 할 수 있을 정도로 객관적인 질문들. 변기 주변은 깨끗한가? 휴지통을 비워져있는가? 휴지걸이에 휴지가 걸려있는가?


나도 비슷한 질문을 만들어보았다. 알람 시간에 맞춰 일어났는가? 모닝페이지를 썼는가? 6시간 이상 작업을 했는가? 4000자 이상의 소설을 써냈는가? 의외로 나는 많은 질문에서 합격이었고, 나의 하루는 5점 밑으로 내려갈 이유가 없었다. 지치거나 기분이 나쁜 상태일 수는 있었다. 하루 회고는 자기 직전에 하는 일이니 자고 싶은 생각이 절실해서 기본적으로 불만족 상태를 깔고 있다. 그러나 그런 기분들이 내가 하루 동안 한 일들을 지울 수는 없었다. 나는 그걸 이제야 구분하게 되었고, 이제라도 나의 좋았던 하루들을 별로였던 하루들보다 잘 보이도록 남길 수 있었다.


화장품을 살 때도 느낌적인 느낌에 속지 말라는 말을 자주 한다. 아버지가 어떤 음식에 대한 효과를 말할 때도 당신의 느낌만이 아닌지를 되묻는다. 그런 건 너무도 추상적이고 바뀌기 쉽다. 정확하지도 않다. 그런 기준에 맞춰 자신을 나쁘게 평가할 필요는 없다. 늘 그렇듯이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나은 인간일 테니. 자신이 정말 별로여서 별로인 인간이라고 하는 건지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기분에 속아 스스로를 미워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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