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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잔하게 Jun 19. 2024

저 반환점까지만

스스로 정한 정지선을 넘어서며 나는 나아졌다



달리기 실력을 키우려면 인내심이 필요하다. 어제보다 더 오래 뛸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견디고 이겨야 하는 고통이 있다. 한계여서 더는 못 뛰겠다 싶은 지점에서 한 걸음 더, 한 걸음만 더 하고 버텨야 실력이 늘어난다. 나는 그런 순간이 올 때 눈앞에 있는 반환점을 주시한다. 반환점이 없다면 스스로 만들어 낸다. 딱 저 앞에 전봇대까지만, 화장실까지만, 철조망까지만, 저 할아버지가 앉아있는 벤치까지만. 나의 달리기는 스스로 지정한 정지선을 넘어서며 나아졌다.


요즘은 그 방식을 일할 때에도 적용하고 있다.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다 보니 해야 할 일이 하루에도 수십 개씩 쏟아지는데, 당연히도 그 많은 일을 전부 다 처리할 수는 없다. 반에 반이라도 제대로 한다면 다행인 일이다. 그럴 때 달리기 할 때 써먹던 반환점 만들기를 시도한다. 지금 당장 할 일을 정하고 그것 하나만 본다. 다른 일은 생각하지 않는다. 일이 끝이 보일 때쯤 다음 반환점으로 삼을 만한 일을 어렴풋이 떠올려본다. 지금 하는 일이 끝나면 바로 그 일로 넘어간다. 다른 일은 생각하지 않는다.


며칠째 이 방식으로 일을 하다 보니 업무가 매우 단순해졌다. 매일매일 성과라고 할 만한 결과물이 있고, 평소보다 하루가 더 여유롭게 느껴지는 순간도 있다. 아마도 아등바등하는 시간을 줄여서 그런 게 아닌가 싶다. 머릿속에 해야 할 일이 가득 차 있을 때는 일을 하면서도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시달렸고, 휴일을 보내면서도 바쁘다는 생각을 했다. 전부 다 불필요한 생각들이었다. 나는 나의 뇌를 신뢰하지 못한 지 오래되어 작업 현황을 세세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그 기록들이 증인이 되어 말해주고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하는 일의 양은 그게 그거라고. 더 많지도 적지도 않으며, 더 나아지지도 나빠지지도 않았다고. 머리가 비워지고 숨 쉴 여유가 생겼으니 오히려 이편이 이득이지 않느냐고 되묻기까지 하며.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여전히 나를 괴롭히고 시험에 들게 한다. 하지만 나는 그 많은 일을 처리할 만한 선수가 아니고, 여전히 훈련이 필요하다. 조급함을 조금 내려놓는다고 당장 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딱 눈앞에 있는 저 반환점까지만, 그런 마음으로 좀 더 달려보자. 지금의 속도가 내게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러하니까, 한동안은 이대로 달려보기로. 멈추지 않고 달리는 것만으로도 나는 이미 만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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