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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잔하게 Jun 21. 2024

가장 밑바닥에 먼저 와 있던 사람이 있었고

카프카 전시회를 다녀와서 쓴 짧은 글


이른 밤이었다. 날이 더워 창을 열었다. 창문으로 시원한 바람이 들어왔다. 바람의 감촉은 따가웠다. 팔꿈치에 발진이 돋았다. 정강이에 발진이 돋았다. 발진은 붉고 가려웠다. 가려운 피부를 긁었더니 피가 났다. 피는 검은색이었다. 검은색은 죽은 벌레의 색이었다. 죽은 벌레가 많았다. 내 방은 벌레들의 방보다 좁았다. 침대 위에 벌레가 누워 있었다. 약을 잘못 먹고 병이 난 벌레들이었다. 벌레 50마리가 일렬로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벌레들의 질서는 인간들의 것보다 엄격했다. 벌레들은 규칙을 어기지 않았다. 인간들은 규칙을 지키지 않았다. 규칙은 개성의 유의어가 되었다. 규칙이 유행이 되면 인간들은 힙해졌다. 통이 큰 바지를 질질 끌고 내가 걸어갔다. 압구정로데오역을 지나 골목으로 꺾어 들어갔다. 내가 지나간 거리가 깨끗했다. 나는 다리가 8개인 힙합 댄서와 고추장 빛깔의 배틀을 뜨고 전시를 보러 갔다. 문명인인 척하기가 힘들었다. 햇살이 강해서 눈을 뜨기가 어려웠다. 르네상스 시대 귀족들이 쓰던 양산을 쓰고 그늘로만 걸었다. 바람이 내 양산을 소매치기하려다가 실패했다. 분노한 바람의 콧김에선 쉰내가 났다. 땀에 전 얼굴. 모공 속 노폐물. 세탁기에 넣고 풀코스로 돌려주세요. 탈탈 털린 인간의 얼굴은 회백색. 회색을 좋아하는 건 극도의 자기애이다. 회색 하트 안에 들어온 타인은 극도의 자기애를 이기는 사람이다. 사람은 사랑과 비슷하게 들려서 일부러 틀리게 발음한다. 사람, 하고 부르면 가슴이 뛰다가도 토할 것 같다. 가장 밑바닥에 먼저 와 있던 사람이 있었고, 우리는 그의 양 옆에 일부러 뭉개진 발음이 되어 수줍은 바람처럼 머물다가 훌쩍 떠나왔다. 벌레가 되는 날 다시 만나기로, 허락받지 않은 약속을 몰래 남겨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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