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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잔하게 Jun 23. 2024

불안의 계절, 시간의 파편

이 여름은 안전할 것이다


어젯밤에는 오래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날이 덥기도 했지만, 안 좋은 생각들이 먹물 번지듯 자라나기 시작하여 평정심을 유지할 수 없었다. 바닥 없이 가라앉기만 하는 마음은 연약하다. 거칠고 잔인한 상상이 파고들기 쉽다. 자아는 자신을 잃는 것이 두려워 스스로 발목에 쇠고랑을 채운다. 안전의 방식이 뒤틀리는 타이밍.


자정이 넘자 선풍기가 너무 무섭게 느껴졌다. 날이 덥다고 하루종일 틀어놓았는데, 아침까지 또 틀어놔도 될까. 자는 사이에 나쁜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까. 이렇게나 더운데 선풍기가 쉬지 않고 돌아가는 게 이상하다. 선풍기의 목을 만지면 아주 뜨겁거나 거의 뜨겁지 않았다. 아주 나쁘거나 거의 괜찮을 거라고 들려서 방심할 수 없었다. 고민하다가 선풍기를 껐다. 방이 금세 후끈해졌지만 가장 불안한 마음은 걷어낼 수 있었다. 정말 여름이구나, 불현듯 실감하는 마음.


여름은 불안의 계절이었다. 실외기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기 시작하면 잠 못 자는 날도 일어날 것이다. 이렇게나 뜨거운데, 보이지 않는 손이 얼굴의 반 이상을 가리고 있는 것처럼 답답하고 숨이 막히는데. 에어컨 실외기가 밤낮없이 돌아간다는 게 너무 무섭다. 어째서 그게 가능한지? 자는 동안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걸 어떻게 장담할 수 있는지? 물음만 늘고, 나는 죽고 싶지 않을 때에도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를 느끼게 될 것이다. 여름은 해마다 뜨거워지고, 나는 더 많은 두통약을 먹거나 자겠지. 나만 왜 이러냐고 억울하기도 할 텐데, 억울해서 우는 건 자존심도 상하고 무엇보다 서러워지니까, 서러우면 진짜 병이 나니까, 머리고 손목이고 아픈 척하면서 슬픈 영화나 보면서 생리적인 눈물을 배출하기도 하면서.


주말에는 거의 아무 일도 하지 못했는데, 집중력이 10분을 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 안의 자아들이 10분 단위로 내 몸을 쓰기로 결정이라도 한 건지. 영화를 10분 보다가 드라마를 10분 보다가  책을 10분 읽다가 10분 탈진했다가. 그런 식으로 하루를 이틀을 살다 보니 잠을 자는 일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처럼 느껴졌다. 그렇게나 긴 시간동안 한 가지의 일을 할 수 있다니. 그래도 저녁을 먹고 나서는 기운이 좀 났는데, 두부조림이 너무도 맛있었기 때문이었다. 땀까지 쪽 흘리며 양념에 밥을 삭삭 비벼먹고 나니 이상하게도 기운이 났고, 밀린 일주일치의 일기를 한꺼번에 몰아서 쓴 뒤 달리기를 하러 나갔다. 30분 동안 쉬지도 않고 뛰었는데, 한창 잘 달리던 때의 나를 드디어 따라잡은 것 같아서 기뻤다. 그 애는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서 모닝페이지를 썼었지. 나도 똑같이 해주겠다고 결심하며 일찍이 씻고 침대 위로 올라가 앉는 일요일 밤.


시간이 조각난 채 흘러갔다고 해서 내가 조각난 건 아니니까.


아름다운 구절들이 구원이 되는 시간이다. 불안을 이기는 건 다정한 마음. 푸른 밤으로 떠난 가수의 늙지 않는 목소리. 시공간을 넘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정말 다행인 일이야. 사랑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들어두도록 하자. 책 속에도, 시집 속에도. 드라마와 노래 속에도. 상상에도, 이승의 끝에도.


이 여름은 안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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