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X리스본행 야간열차③ 뿌리까지 나를 알려는 시도

440쪽까지 읽고

by 나나
IMG_4560.jpeg




*

종종 떠올려보는 드라마의 한 장면이 있습니다. 그레이 아나토미라는 미국 드라마에서 나온 장면인데요. 주인공 메러디스가 신생아실에 있는 아기를 바라보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어떻게 저기에서(신생아실) 여기(메러디스 자신)까지 올 수 있었을까요?”


정확한 대사를 기억하는 건 아닙니다만, 말의 맥락과 메러디스의 눈빛을 오래도록 잊지 못했습니다. 당시에는 너무도 공감이 되어서, 이후로는 정리된 답을 가지고 싶어서요.


지금의 나를 나로 만들게 한 결정적인 요인은 무엇이었을까요? 나는 어쩌다가 내가 되고 말았을까요?



IMG_4556.jpeg
IMG_4553.jpeg
IMG_4563.jpeg
IMG_4566.jpeg



*

어느 날 갑자기 리스본으로 떠났던 그레고리우스는 역시나 갑자기 베른으로 돌아옵니다. 인생을 다르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떠난 사람이 이번에는 익숙한 곳에 있고 싶다며 목적지를 바꾼 겁니다. 그런데 돌아온 고향은 전과 같지 않습니다. 말도 통하지 않는 나라에서 이방인으로 생활했듯이 평생을 살아온 곳에서도 이방인으로 떠돌고 있습니다. “발이 닿지 않는” 감각이 그를 지배하고, “친숙한 사물들이 이제 그 스스로를 잃게 한다는 공포”가 찾아옵니다. 베른이 일상이던 그레고리우스는 없어졌어요. 그레고리우스는 자신을 잃은 채로 고향을 배회합니다. 여기서도 저는 드라마 속의 한 장면을 떠올렸는데요.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는 흔한 연출 장면이 있지요. 한 사람이 같은 장소를 몇 번이고 걸어갑니다. 주변의 배경만 빠르게 모습이 바뀝니다. 잎이 지고, 열매를 맺고, 눈이 내리다가 다시 꽃이 피는 식으로요.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 시간을 빨리 돌리기로 작품과 합의하며 몇 초만에 몇 번이나 사계절을 살아낸 주인공을 만나곤 합니다. 그에 비유하자면 이 소설은 시간을 돌리다가 중간쯤 멈춘 것 같아요. 4년 뒤로 가기로 모두가 합의했는데, 어쩐 일인지 주인공만 1년 8개월 하고도 5일쯤 되는 지점에 덩그러니 떨어져서 큐 사인을 받는 겁니다. 그때 주인공은 자신이 서 있는 주변을 어떻게 느끼고 반응할까요? 그가 아는 것은 4년 뒤(지금부터 우리가 현재라고 여길)의 자신의 표정과 행동, 대사일 텐데. 자신이 이미 살아낸(그렇다고 약속된) 과거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이런 우연적인 사고가 아니라면 되짚어볼 일이 없는 무수한 과거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도서관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던 1000번의 나 중 524번째 나는 어떤 기분이었을지, 매일 똑같이 앉던 자리에 앉아서 무엇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지. ‘과거의 나’로 현재를 살아보는 기이한 체험. 자신에 대해 알아보려는 새로운 “시도”라고 할 만합니다. 프라두는 “이 과거”야말로 “현재”라고 자신의 책에 쓰기도 했죠.



IMG_4550.jpeg
IMG_4565.jpeg
IMG_4564.jpeg
IMG_4568.jpeg



*

익숙했던 시공간이 낯설어지는 혼란스러움 속에서 그레고리우스는 몇 가지의 시도를 합니다. 그중 하나가 과거 자신이 가정교사로 일할 뻔했던 집을 찾아가는 건데요. 소설에서는 “과거의 내가 살았을 수도 있는 삶”에 대해서 자주 언급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어차피 안 될 일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겨온 부분이기도 한데, 소설의 중반을 넘어서는 여기까지 와서도 몇 번이나 말하고 있으면 이쪽에서도 고심해 볼 수밖에 없어요. 도대체 이 양반들은 왜 돌이킬 수 없는 일에 대해서 이처럼 고뇌하는지를.


그 가능성까지 포함하여 자신이라고 말하고 싶은 걸까요? 다르게 살 수 있었다면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았을 거라고 암시를 주는 걸까요? “중단된 삶, 온갖 약속으로 가득한 그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거라고 믿기라도 해야 현재를 견딜 수 있는 것인지. 불가능한 질문을 계속 함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자신을 받아들이려는 시도인 건지.


프라두는 “생의 특정한 장소”에 있는 자신(과거)을 “현재”라고 말하며 “시간이 몰고 온 수천 가지 변화는” “꿈없이 덧없고 비현실적이며 환영”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그는 “욕망, 만족, 편안함”은 헛된 것이며, 감정 저편에 위치한 영혼의 견해 표명인 “신의”만이 중요하다고 했어요. 그에 따르면 우리가 삶의 중요 요소라고 생각해 온 모든 것들이, 심지어 현재의 나라는 존재까지도 의미가 흐려집니다. 내가 진실로 살아봤다고 할 수 있는 어느 특정 시점의 나로서만 발언권을 얻게 되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그 특정 시점은 어느 때라고 말할 수 있을지요? 애초에 내가 진실로 살아봤다는 얘기는 무엇을 근거로 들 수 있습니까?


이런 생각들을 이어가다 보면 그레고리우스가 말한 “발이 닿지 않는다”는 감각이 무엇인지를 알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이 어정쩡하고 찝찝한 기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내가 진실로 살아봤던 때를 이야기하고 그 근거를 찾아 제시해야 할 것 같군요. 결국 이 소설은 자신이 머무는 곳에 “발이 닿”는 감각을 알려주기 위해서 쓴 작품이지 않나 싶습니다. 뿌리까지 깊숙이 내릴 수 있을 만큼 ‘나’를 알기. ‘내가 있어야 할 곳’을 알기. 자신에 대한 이해는 타인을 배제하고는 불가능하므로, 남을 먼저 이해하러 나서기. 인간과 인간이 서로를 이해한다는 불가능한 과제에 부딪히기. 시도하고 또 시도하기.



*

그러나, 저는 여전히 알 수가 없네요.


‘나’는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까요?




IMG_4418.jpeg


이번 회차를 준비하는 동안에는 우연이라는 말을 자주 떠올렸어요. 언제 어디서부터 내가 되었나를 고민하다 보면 결국 나는 무한한 우연의 산물이구나 하는 생각으로 빠지게 되더라고요. 하지만 책이 말하는 건 그게 아닌 것 같았어요. 책을 읽다 보면 우연보다는 자기 결정에 더 중심을 두고 싶어졌습니다. 그러니까 노아야,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라 자기 결정이었다고 하자. 네가 너를 선택했고 나도 나를 선택했다고. 네가 플레이브를 선택했고 나는 플리를 선택했어.



https://youtube.com/shorts/wf2e5KdIDpY?si=7h1rv21x02OQqDqV


아름다운 화음 듣고 주무세요.


저는 다음 주까지 책 다 읽고 4화 들고 올게요. 그 다음 주에 최종화(전체정리 및 연재 후기) 올라가고 -> 모집글(한 주 쉬고) 공지 후 다음 최애 책으로 넘어갑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수요일 연재
이전 03화노아X리스본행 야간열차② 프라두를 아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