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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 장의 사진(12)

1959년 9월 4일 강릉시 읍면장회의 기념

by 강동수

강릉의 근대 이후 역사를 간략하게 살펴보면 1931년 4월 1일 강릉면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1938년 9월 1일 정동면이 경포면으로 개칭되었다. 1940년 11월 1일 신리면이 주문진읍으로, 1942년 10월 1일 망상면이 묵호읍으로 승격되었다.


1955년 9월 1일 강릉읍과 경포면, 성덕면이 병합되어 강릉시로 승격하였다. 이와 동시에 강릉군이 명주군으로 개칭‧분리되었고, 1980년 4월 1일 묵호읍이 동해시에 편입되었다.


1959년 9월 4일 강릉시 읍면장회의 기념 Ⓒ강릉시


위 사진은 1959년 9월 1일 이기재 강릉시장이 부임한 이후 처음으로 열린 읍면장회의 때 기념촬영을 한 것이며 앞줄 오른쪽에서 3번째는 1956년 8월 8일 시행된 제2대 읍‧면장 선거에서 당선된 민병걸 묵호읍장이다.

1956년 8월 8일 선거에서는 기초자치단체인 시‧읍‧면장 전체를 일제히 선거한 것이 아니라 이른바 ‘기득권자’라 해서 임기 4년이 끝나지 않은 자에게는 정해진 임기까지를 보장해 주고 그때 가서 선거를 통해 후임자를 선출하는 방식이었으므로 이에 따라서 강원도에서는 춘천, 원주, 강릉 등 3개 시장 중 원주, 강릉 2곳은 ‘기득권자’로 분류되어 춘천시장 선거만 치렀다.

이기재 강릉시장은 임명직 시장으로 재임기간은 1959년 9월 1일~1960년 5월 23일이었으며 1960년 발생한 4‧19혁명으로 인하여 사퇴하였다. 이에 대한 자세한 상황이 1960년 4월 28일 자 『동아일보』에 실려 있으며 그 기사의 원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규탄받는 도지사. 시장. 군수. 서장

독재정권 앞잡이 노릇

각 지방에서 물러가라고 요구

차츰 냉정을 찾아가는 서울 시민들과는 달리 각 지방에서는 민중들의 흥분이 아직도 가라앉지를 않고 제각기 지방행정 책임자를 비롯하여 경찰서장 등의 사퇴를 강력히 요구하는 「메모」를 계속 감행하고 있는 곳이 많은가 하면 곳에 따라서는 군중의 압력에 못 이겨 이미 사퇴를 한 지방장관도 허다한 실정이다.

【강릉발】 강릉시장 이기재 씨는 27일 정오 사표를 제출하고 4‧19사태 이후 인근 주문진읍, 묵호읍 등에서 「메모」가 일어남에도 잠잠하기만 하던 강릉 시민들은 거의 무표정에 가까운 냉정한 공기로 중앙 소식에 만전 신경을 쓰고 있다 이 대통령의 하야 소식에 동요를 보이기 시작, 곳곳에서 옹기종기 중앙 소식 얘기만 하던 차 27일 지난해 10월 기용 발령 취임한 이기재 강릉시장은 도의적 책임을 지고 사표를 제출하였다.”

한편 민병걸 묵호읍장에 대하여 『동해시근현대사료집』에 있는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옥봉(玉峯) 민병걸(閔丙杰)은 1899년 11월 8일 현 동해시 망상동 339-2(망상2길 14)에서 출생하였으며, 강릉간이농업학교(국가기록원 기록 인용)를 졸업하였다.


1936년 3월 15일 어업 및 수산제품업, 해륙산물 및 기타 물품의 매매업, 해륙운수업 등의 부대사업을 목적으로 설립한 강릉산업(주)의 대표자였으며, 1938년 1월 20일 어업 경영, 유비(油肥) 제조 등의 집행에 따르는 부대사업을 목적으로 설립한 강릉합동수산(주)의 대표자였다. 또한, 국가기록원의 기록에 따르면 민병걸은 1946~1950년 정도의 기간에 묵호어업조합 조합장을 지낸 것으로 나타난다.


이후 지방자치제도의 실시에 따라 1952년 4월 25일 시행된 읍‧면 선거에 의해 구성된 읍‧면의회에서 간선제로 민선 제1대 묵호읍장에 선출되었으며, 1956년 8월 8일에 시행된 제2대 읍‧면장 선거에서도 5,549표를 얻어 민선 제2대 묵호읍장에 당선되어 1960년 말까지 역임하였다.


망상동에 있는 민병걸 기적비의 기록에 의하면 민병걸 읍장은 교육 분야에서는 망상국민학교 설립 당시 약간의 토지와 현금을 희사하였으며 또한, 묵호국민학교 증축과 동호국민학교 및 묵호중‧고교를 설립할 때 많은 기여를 하였으며, 농수산 분야에서는 마상평야를 정리하여 토지를 넓히고, 항만 확장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옥봉 민병걸 기적비 Ⓒ강동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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