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지증왕 13년(512)에 이찬 이사부가 하슬라주(何瑟羅州)의 군주로서 우산국 정벌에 나서고 선덕왕 8년(639)에는 하슬라주를 북소경(北小京)으로 삼아 사찬 진주(眞珠)에게 명하여 이를 지키게 함이 확인되고 있어 예부터 강릉이 하슬라로 불렸음을 알 수 있다. 이후 하서부(河西府), 명주도독부(溟州都督府), 명주목(溟州牧), 명주단련사(溟州團鍊使), 연해명주도(沿海溟州道) 등으로 불려왔다.
그리고 『삼국유사』 「수로부인」 편에 “성덕왕 때에 순정공이 강릉태수(지금의 명주)로 부임할 때 바닷가에 가서 점심을 먹었다.(聖德王代 純貞公赴江陵太守 今溟州 行次海汀晝饍)”라고 하여 ‘강릉’이란 지명이 나오나 이는 1281년 무렵에 일연이 삼국유사를 쓸 때 얼마 전에 사용되었던 이름을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삼국사기』에서는 성덕왕 14년(715)에 하서주(河西州), 성덕왕 20년(721)에 하슬라도(何瑟羅道)라는 지명을 사용하였으므로 『삼국유사』에서 ‘강릉’이란 지명이 성덕왕 대에 사용된 것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위의 기록에 나오는 하슬라, 명주라는 지명은 잘 알면서 정작 ‘강릉’이란 지명이 언제 처음 사용되었느냐 하는 질문을 하면 대부분은 잘 모른다고 대답을 하는 실정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세종실록』 「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있는 기록을 바탕으로 강릉이란 지명이 처음 등장하는 시기를 확인하여 보았다. 두 사서의 기록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세종실록』(1454) 「지리지」, 강원도
“본래 예맥(濊貊)의 땅인데, 뒤에 고구려의 소유로 되었다. 고려 때에 이르러 영동(嶺東)은 성종(成宗) 14년 을미 【송나라 태종(太宗) 지도(至道) 원년.】 에 삭방도(朔方道)라 불렀고, 명종(明宗) 8년 무술 【송나라 효종(孝宗) 순희(淳熙) 6년.】 에 연해명주도(沿海溟州道)라 불렀으며, 원종(元宗) 4년 계해 【송나라 이종(理宗) 경정(景定) 4년.】 에 강릉도(江陵道)라 불렀었다. 공민왕(恭愍王) 5년 병신 【원나라 순제(順帝) 지정(至正) 16년.】 에 강릉삭방도(江陵朔方道)라 불렀고, 또 다음해 정유에 강릉도(江陵道)라 불렀다가, 또 4년 경자에 삭방강릉도(朔方江陵道)로 불렀고, 또 7년 병오에 다시 강릉도라 불렀다.” (후략)
2. 『신증동국여지승람』(1530), 강원도
“본래 예맥(濊貊)의 지역이었는데, 후에 고구려와 신라의 소유로 되었다. 고려 성종(成宗) 14년에는 화주(和州)ㆍ명주(溟州) 등 고을로써 삭방도(朔方道)로 만들었고, 춘주(春州) 등의 고을을 예속시켰다. 명종(明宗) 8년에 삭방도는 연해명주도(沿海溟州道)라 고쳐 부르고 춘주 등 고을은 처음으로 춘주도라 하였는데, 혹 동주도(東州道)라 부르기도 하였다. 원종(元宗) 4년에 명주도는 강릉도(江陵道)로, 동주도는 교주도(交州道)라 고쳐 불렀고, 충숙왕 원년(忠肅王元年)에는 교주도를 회양도(淮陽道)라 고쳐 불렀다. 공민왕(恭愍王) 5년에 강릉도를 강릉삭방도라 고쳐 부르다가 6년에는 다시 강릉도라 불렀다. 9년에 강릉삭방도라 부르고 15년에 다시 강릉도라 불렀다.” (후략)
위의 두 기록에서 똑같이 고려 원종 4년(1263)에 ‘강릉도(江陵道)’라는 지명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강릉(江陵)’이란 지명은 1263년에 처음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