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흙수저일까 아닐까?

유학 준비하면서 돌아본 나의 인생, 우리 가족의 인생

by 방랑자대니

오늘은 정보성 글이 아닌, "나"에 대해서 얘기해보려고 한다.


유학을 준비한다고 하면 가장 큰 오해 중 하나는 집이 잘 산다는 것이다.

사실 마냥 틀린 편견만은 아니기도 한 게 실제로 유학을 준비하면서 만났던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집이 잘 사는 편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들이 너무 부러웠다.


근데 대니 님도 결국 같은 유학 준비하는 사람이고 그럼 부자 아니에요?


그 답변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아니라고 얘기할 수 있다.


그럼 흙수저예요?


이제 여기서 애매해지는데 확실한 건 "지금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답변에서 항상 참 모호했던 이유는 우리 집은 정말 내가 태어난 순간부터 나날이 나아졌다. 왜냐면 정말 우리 부모님은 아무것도 없이 시작하셨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없다기보다도 어떻게 보면 마이너스로 시작하셨다는 것이 더 적합할 것이다.


어린 시절 3.jpg 할머니집 에서의 나


우리 부모님은 두 분 다 시골에서 올라오셨다. 아버지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어머니는 경제적으로 더 상황이 안 좋아 서울로 올라와 일을 병행하면서야 고등학교를 마칠 수 있었다. 그렇게 꾸준히 일을 하셨고, 한 직장에서 만나 결혼을 하셨다. 당시 정말 없는 살림에도 그나마 할머니가 모아놓으신 돈으로 어떻게든 시작할 수 있었는데, 하필 또 아버지께서 친구에게 일종의 사기 같은 걸 당하셨다. 아버지는 자존심도 상하고, 기억하기도 싶지 않기에 우리에게 일절 언급을 안 하시지만 어머니께서는 조용히 귀띔해주셨다. 그렇게 우리 부모님은 신혼이 시작하자마자 사실상 마이너스로 생활하셨다. 그리고 내가 태어나고, 내 동생이 태어났다.


그렇게 정말 안 해본 일이 없으셨고 결국 우리는 조그마한 김밥집을 열 수 있었다. 그때 내 나이가 8살이었다. 보통 기억이 선명하게 나는 시점이 5살 이후니, 내 동생들은 기억이 나는 시점부터는 정말 일만 하셨다. 어머니는 새벽 6시도 전부터 나가 김밥을 썰고, 아버지는 밤 12시가 넘어서 재료준비하고 들어오고 가 일상이었다. 내가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는 건, 어머니가 막내 동생을 임신하고 출산하기 직전까지 김밥을 써셨다. 배가 나와서 도마에서 멀찍이 떨어져 김밥을 써는 모습이 8살 아이에게도 이상하게 느껴졌다.


솜씨 좋은 어머니와 성실했던 아버지 덕분에 장사는 정말 너무도 잘됐다. 학교가 소풍이라도 가면 반에 10명은 우리 집 김밥을 싸왔을 정도니 말이다. 그렇지만 돈과는 거리가 멀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째는 마이너스로 시작했다는 점, 둘째는 아이가 셋이라 한창 돈이 많이 들 때라는 점, 셋째로는 결국 아이들이 가있을 곳도 없고, 아버지 어머니께서는 어릴 때 학원 한 번 못 가봤다는 것이 한이었기에 학원을 많이 갈 수밖에 없었다.


이후에, 그 살인적인 스케줄에도 더 야망 있으셨던 아버지께서는 그 복잡한 분식집에서도 책을 붙들며 공인중개사 시험에도 합격하셨고, 결국 부동산도 개업하셨다. 이후 어머니께서 도저히 몸도 마음도 지쳐 김밥집을 을 혼자 운영하실 수 없어 정리하고, 두 분은 부동산을 같이 운영하셨었다. 그렇게 몇 년간 일하신 후, 부모님은 인생을 바꿀 수 있는 제안을 하나 받으시는데, 바로 같은 상가에서 마트를 운영하시던 사장님이 마트 인수를 제안하셨다. 본인들은 은퇴하셔야 하는데 결국 세를 위해서는 마트를 성실하게 운영해 줄 사람이 필요했고 아버지의 성실성을 오랜 기간 지켜본 그분들께서 제안을 주셨다. 그때가 내가 21살이 되기 직전, 결국 우리 부모님께서는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걸고 한번 더 도전하셨다. 그 일이 지금도 우리 부모님이 하고 계신 일이다. 그리고 그 이후로 경제 상황이 많이 나아졌다.


어린 시절 4.jpg 김밥 집을 시작하기 전에는 그래도 같이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앞서 우리 부모님의 여정을 보면 돈도 벌고 한 것 같지만 전혀 우리의 삶은 그렇지 않았다. 어머니는 매일 우리한테 돈이 없다고 한탄하셨고, 그리고 그건 그냥 사실이었다. 부모님은 그 어린 나이인 내가 봐도 정말 더 이상하면 죽을 정도로 일하시고 돈은 없다고 하시는데 내가 어떻게 이게 사고 싶고 이게 하고 싶다고 도저히 말할 수가 없었다. 내가 뭘 꿈꾸기 전에 돈부터 걱정되었다. 예를 들면, 중학교 내내 외고준비반에서 공부하다 괜히 학비 걱정 때문에 사실은 일반고가 가고 싶었다고 거짓말하고 포기했다. 그러고는 고등학교 1학년때까지도 항상 친구들의 외고 생활이 부러워 페이스북을 염탐했다. 그것의 정점은 수능이었다. 수능에서 아쉬운 결과를 얻었고, 학원 선생님께서는 미래를 위해서 적극적으로 재수를 권장하였고 나도 고민 끝에 부모님께 말씀드렸었다. 하지만 부모님께서는 고심하시더니, 정말 미안하지만 우리 형편이 안되니 지금 붙은 학교라도 본인들은 만족하니 그냥 갔으면 좋겠다고 하셨고 나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풀대출을 받아서 학교에 입학했다.


조금은 어른이 된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그때 당사자인 나보다도 아버지께서 얼마나 더 슬프셨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다만, 이런 반복된 무기력감에 나는 한동안이나 마인드적으로 흙수저였다. "아 나는 돈이 없으니까 A는 못하고 B, C만 되어도 좋겠다"라는 내 마음속의 박스가 있었다. 그걸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러니 자꾸 선택과 결과들이 이상해졌다. 대학교 때 만난 은사님 덕분에 MBA를 언젠간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머릿속으로는 두려웠다. 학비, 생활비, 기타 등등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넘지 못할 벽 같았다. 24,25살 때 내 가슴은 이미 MBA를 향했지만 섣불리 발을 뻗지 못했다.


이 흙수저 마인드셋은 우리 어머니 아버지의 헌신으로 구축 작은 평수만 돌아다니던 우리가 신축 아파트에 들어가게 되고, 내가 과일가게를 하면서 약간의 목돈이 생기면서야 벗어날 수 있었다.


"아 나 이제 할 수 있을 거 같아"


이 생각이 들게 되었고, 정말 그때는 바로 결정할 수 있었다. 그리고 허무했다. 이게 이렇게 쉽게 결정할 수 있는 거였다니....


이것이 나는 흙수저인가 아닌가라는 질문에 대한 나의 이야기이다.


우리 집이 비싼 집도 아니고, 부모님은 여전히 하루도 쉬지 않고 출근하시고, 나도 모아놓은 돈은 다 까먹고 30대 중반에서야 돈을 제대로 벌겠지만 나는 이제는 당당히 말할 수 있다.

나는 이제 흙수저가 아니다. 그렇게 될 수 있었음에 다시 한번 부모님께 감사하고 내 인생에 있어서도 이 극복의 과정을 지켜본 것이 정말 큰 자양분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다시 한번 사랑하고 존경해요 엄마 아빠!



그럼 다음에 만나요!

아마 인터뷰 준비에 관한 내용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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