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위혜정 Oct 01. 2024

고3 출결, 이상유!

옳음 vs. 친절함

 '수시' 원서 접수라는 거대한 물결이 지나간 후, 고등학교 3학년 교실은 잠잠다. 학생들과 학부모로 북적이던 교무실도 썰물이 빠져나가듯 조용해지고 담임교사들은 대입 자료 정리, 면접 준비, 2학기 1차 지필 평가 및 수행평가로 새로운 시즌을 맞이할 채비를 한다. 학생들은 3학년 1학기 내신이 마무리되고 수능과 대학 별 고사(논술, 면접, 실기) 준비에 여념이 없다. 드디어 수능 시험에만 올인하면 되는 때가 온 것이다. 소위 말해 정시 파이터(내신이 '수시전형'에 지원하기에 어려움이 있을 정도로 좋지 못하거나, 수능 모의고사가 잘 나오면 학교 내을 버리고 오로지 대학수학능력시험만을 위해 공부하는 수험생들)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시이다. 물론, 그런 학생들은 1학기 때부터 자신의 갈 길을 꿋꿋하게 걸어오긴 했지만 말이다.  


 모든 에너지가 수능 시험 하나에 집중되어 있는, 그만큼 중요도가 높아 3학년 2학기 교육 과정 왜곡되어 맥을 못 추는, 교사의 입장에서는  빠지는 시간이 시작되었다. 고등학교 3학년 2학기 교실 붕괴는 출결에서부터 시작된다. 재수를 하지 않는 한, 대입 수시에서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는 3학년 2학기 일부 학생들에게 텅 빈 무용의 시간이다. 아침 조회를 위해 반 학생들을 만나러 교실에 들어가면 의례히 한 학생이 이런 질문을 던진다.


"선생님, 오늘은 누구누구 안 와요?"


 이런 질문은 왜 하는 걸까? 아이들도 안다. 누가 학교에 오지 않는 지를. 어떤 핑계를 대고 오지 않을 것인지도. 그걸 모를 것 같은 담임교사에게 넌지시 알려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힘주어 물어본다. 이에 대해 어찌 답할 수 없어 오히려 되묻는다.


"맞춰봐."


 그러면 기다렸다는 듯이 줄줄줄 친구들의 이름을 읊는다. 결석생의 명단은 놀랍도록 정확하고 또 매일 일정하다. 그래, 네가 알고 있는 것을 선생님모를 리가 있겠니. 학교에 잘 나오는 학생들과 자주 빠지는 학생들은 정해져 있다. 후자의 비율이  늘어나는 상황의 무게오롯이 담임이 감내할 몫이다. 아프다고 하면 당연히 마음이 쓰인다. 단, 사실이 아닌 질병을 가장한 결석/조퇴, 여학생의 경우 한 달에 한번 용인된 생리 결석/조퇴가 오남용 되는 사례 앞에서 마음 상하는 일들이 많아진다. 이런 일이 쌓이다 보면 진짜와 가짜를 분별해 내려는 눈초리가 매섭게 올라갈 때도 있다. 그래서, 힘들다.




 전날 2교시에 생리 조퇴를 했던 여학생이 또 생리 조퇴를 쓰겠다고 찾아왔다. 안된다고 했더니 돌아온 답이다.


 "생리 조퇴 한 달에 3번 쓸 수 있는 것 아니에요?"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이런 경우 처음이라 당황스다. 정말 아파서 가는 거냐고 물었더니 아니다. 집에 가서 공부를 하려는 속내를 내비친다. 당연히 미인정(무단) 조퇴인데 생리조퇴로 처리하겠다는 것이 맞을까? 학생의 솔직함이 오히려 마음을 른다. 여학생들에게만 허락하는 인정 결석, 오히려 남학생들에게 역차별이 될 수 있기에 개인적으로 조심스러운 결석 사유다. 피치 못해 쓰는 경우는 당연하지만 아무 증상 없이도 한 번쯤 학교 나오고 싶지 않을 때 쓰는 여학생들이 있다. 아프지도 않은데 조심스레가 아닌, 당연한 권리처럼 챙겨 쓰는 사례들이 공공연하다고 해야 할까. 특히 대입에 반영되는 1학기에는 한 번도 쓰지 않던 생리결석을 2학기 때부터는 꼬박꼬박 챙기는 경우가 봇물처럼 터진다. 없던 생리통이 시기를 봐가며 발생하는 것은 아닐 텐데.


 점심을 먹으며 담임교사들이 각반의 출결 관련 도덕적 해이의 사례들을 놓고 푸념을 늘어놓는다. 같은 처지라 공감 백배다. 각 반마다 한 두 명씩 담임교사의 마음을 휘젓는 학생들을 보며 교사로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고민이 깊어진다. 그냥 늦으면 무단 지각이지만 늦잠 자고 병원에 들렀다 진료 확인서 한 장 학교에 제출하면 질병 결석이다. 무단과 질병, 하늘과 땅 차이다. 그냥 넘기기 쉽지 않은 유혹이란 걸 안다. 한 번이 어렵지 두세 번 하다 보면 크게 잘못되었다는 느낌도 없어진다. 병원에 지불하는 진료 확인서 한 장 값 원칙교환하는 학생들과 학부모들, 오히려 그걸 이용하지 못하고 학교생활기록부에 '무단'이란 두 글자를 남기는 것이 바보다.  왜? 출결이 대입에서 정량화되어 반영되는 이상, 무단이 아닌 질병으로 감춰진 기록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맘 카페에서는 '진료 안 받고도 확인서 발급해 주는 병원 없나요?'라는 질문이 공공연히 올라온다니 씁쓸하다. 가져다주는 진료 확인서 대로 무단이 아닌 질병에 체크를 하며 학생들의 출결 세탁에 동참해야 하는 상황을 마주할 마다 회의감이 든다.  공교육 붕괴나 교권 하락과 같은 거창한 주제를 건드리려는 것이 아니다. 그저 융통성이란 이름으로, 윤리 도덕적인 기본 틀이 흔들리고 는 상황이 안타까울 뿐이다. 수능이나 논술 등 대입 공부에 매진을 하려면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니 눈감아 달라고 보내는 무언의 아우성, 3학년 2학기 학사 일정을 무력화하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부작용과 탈진학교에 떠넘기는 대입 제도, 은 것을 가르치고 지켜내야 하는 교육 현장에서 공공연하게 발생하는 도덕적 해이 앞에 끊임없 반복된 마음의 소요를 어디에 토로할 수 있을까.


 "모두가 그래도 너는 그러지 말아야지!"라는 확고한 가정교육의 부재가 아쉽다. 아니, 아프지도 않은 아이를 매번 진료하고 확인서를 떼어주는 병원도 야속하다. 단골손님들을 딱 보면 알 텐데 말이다. 자녀를 이기지 못하는 부모, 환자에게 너그러운 의사, 증명 서류 앞에서 맥을 못 추는 학교 행정, 서로 어쩔 수 없는 상황은 마찬가지일까? 총체적인 난국이다. 매일 치러 내야 하는 버거운 감정 소진은 대학 입시가 가져다준 어두운 그림자이다. 대입이 중요해진 중등교육의 현실 앞에서 '적어도 서류 뒤에 가려진 비양심은 아니지 않을까?'라는 원칙론을 들이밀지만 부모의 입장도, 학생의 입장도, 교사로서 학생들의 생기부를 지켜줘야 하는 책임도 전부 이해가 다. 그래서 마음의 소모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문득, 우리 사회에서는 어떤 인재를 양성하기 원하는 것인지 질문을 던져본다. 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조금 손해를 보는 것처럼 보이지만 묵묵히 해야 할 일을 해내는 인재가 필요한 걸까? 상황에 따라 융통성 있게 원칙의 선을 넘기면서 기회를 이용하는 것이 맞는 걸까? 결국, 결과가 좋건 나쁘건 '그거 봐라!' 하는 반응이 따르게 된다.


'미련하게 원칙을 지키더니 결과가 이게 뭐니?'

'역시 적당한 융통성과 노력으로 해냈구나!'


 모두 결과 중심적 평가. 과정의 가치를 높여주는 장치가 잘 장착되어 있지 않는 사회에서 의례히 인출되는  반응이다. 과정이 아닌 결과가 기준되는 판단의 패러다임으로는 도저히 헛헛함을 메꿔줄 답을 찾을 수 없을 것 같다. 그렇다고 매번 들썩이는 마음을 내버려 두자니 출렁임이 크다. 어떻게 반응하고 결정하는 것이 옳을까, 아 '바람직'할까?


옳은 것과 친절함,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
친절함을 선택하라.


 소설 '원더(Wonder)'에서 나온 말이다. '가혹한 정의보다 계산 없는 자비가 낫다'는 말과도 맥을 같이 다. 원더의 주인공은 사람들이 가진 보통의 기준에서 벗어난 외모로 차가운 시선을 견뎌야 했다. 누군들 장애를 안고 태어나고 싶으랴? 비장애가 옳고 장애가 틀린 은 아니다. 다른 것이다. 그 누구도 틀리지 않고 모두가 맞다. 그럼에도 옳고 그름의 잣대를 들이대면 자연스레 누군가는 름이 아닌 틀림이 된다.


  '옳은 것'이 있으면  반드시 '그른 것'이 있다. 이분법적 사고. 당연히 그른 상대가 이해되지 않는 경직성  따라. 나의 옳음이 반드시 너의 옳음아닐 텐데 말이다. 옳고 그름을 따지다 보면 마음을 써야 할 곳에 쓰지도 못한다. 판단자가 되어 감정 소요의 수렁에 빠질 뿐이다. 경찰도, 형사도, 판사도 아닌 이, 진짜와 가짜를 분별하기 위한 애씀도 부질없는 낭비다.


  날 선 정의를 접어 넣고 부드러운 이해의 마음을 꺼내 든다. 신기한 것은 '역지사지'하는 '친절함'을 걸치면 모두 이해된다. '그럴 수도 있지...'의 넉넉한 품은 너에게도 나에게도 불필요한 상처를 남기지 않는다. 친절함은 이해다. 상황을 좀 더 유연하게 바라보는 시선사뿐하게 걸을 수 있는 생의 지혜일지도 모다. 물론, 나 같은 사람에겐 쉽지 않다. 하지만 가볍게 걷고 싶다. 이제, 친절함으로 지친 나의 마음부터 일으켜 세우련다. 나를 위해, 그리고 너를 위해.





매거진의 이전글 대입 수시 상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