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기 초 첫 상담을 할 때, 아이들의 성적을 보지 않는다. 성적으로 선입견을 갖지 않기 위한 나름의룰이다. 물론, 학업 성취도(성적)는 여러 가지를 판단하는 잣대가 된다. 학생의 성실도, 자기 관리 능력, 책임감, 인내와 과제 집착도 등 생을 살아가는 기초 체력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지표다. 다만, 숫자가 알려줄 수 없는 가능성과 잠재력이 배제되어 있다는것이 한계다. 점수, 등수, 등급, 백분위 등의 수치 뒤에는 존재하지만가려진 영역이 분명히있다.시기는 다르지만 누구나에게 심긴발전 가능성이라는씨앗은 어디서, 어떻게 싹을 틔울지 모르는 일이다.이를 제한하지 않기 위해, 포텐이 터지길 바라는 마음으로아이들과의 첫 일대일 만남에서만큼은 성적이라는 기준을 걸러낸다.
대입 수시 상담은 다르다.성적이 빠질 수 없는 참고자료다.성적으로 갈 수 있는 대학을 따졌을 때 현실과 이상의 갭이 큰 경우가 대다수다. 이를 가늠하고 조정해야 하는 담임의 임무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지만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날마다 새벽이면 잠에서 깨어나 다시 잠들지 못하는 날이 지속됐다. 나중에야 알았다. 왜 자꾸 깨는지를. 정신적으로 참 많이 힘들었던 모양이다. 이 아이들을 어쩌나. 내가 뭐라고감히 줄 세우듯 아이들을 성적이라는 꼬리표로 갈 수 있는 대학을 판단하고 매칭해주고있는 건지.
빡빡한 스케줄의 업무로 집에 일을 싸들고 오는 날이 다반사였기에 육체적인 탈진은 기본이었다.그보다 더욱 힘든 것은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넘나드는줄다리기였다.내신이나 모의고사 성적은 나오지 않는데 가고자 하는 대학은 저 위쪽에 있어서원서를 쓸 때만큼은 학생들의 눈높이를 끌어내리는 것이 급선무였다. 안 그러면 정시로 미끄러질 확률이 높은 터라 대학을 가야 할 의향이 있다면 수시로라도 원서를 잘 써야 한다.
통계를 토대로 가상 시나리오까지 짜가며 원서 6개를 맞추는 작업에 학부모와 학생의 반응은 각양각색이다. 성적이 잘 나오는 학생들은 큰 걱정이 없지만 애매한 경계선에 있는 대다수의 아이들은 현실 부정형, 현실 인정형,현실 도피형등의 모습을 보인다.
- 성적을 더 올릴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재수를 불사하더라도 이 대학 밑으로는 안된다며 마지노선을 또렷하게 긋는 경우(현실 부정-미래 긍정형)
- 현실을 인정하고 성적에 맞춰 열심히 원서를 쓸 대학을 찾아오는 경우(현실 인정-적극 실행형)
- 현실을 인정하지만어찌 되겠지 하는 막연함으로원서를 쓸 대학을 찾지 않고 손을 놓고 있는 경우(현실 인정-소극 무기력형)
- 현실을 괴로워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멍하게 있는 경우(현실 도피형)
8월부터, 아니 여름방학 전부터 가지고 오라고 무한 반복했던 수시 희망 대학 리스트 상담 카드를 내지 않는 아이들이 부지기수였다. 몰아치는 업무 속에 여러 번 불러다 말해도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 느린 걸음의 아이들을 채근하는 데 에너지 소모가 상당했다. 기다리다 지쳐 눈을 치켜뜨자 결국 현실 도피형 아이들은 눈물을 흘리고야 만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모르겠어요.'
'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부모님이 못하게 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눈물을 터뜨리며 고민의 무게를 호소하는 아이들을 보니 마음이 짠하다. 앉혀놓고 눈물 젖은 속내를 들으며 다독인다.무기력은 나름의 꽉 막힌 고민덩어리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멍하게 어찌할 바를 몰라 표현조차 못하는상태라고 할까.성적으로 창창한 자신의 미래를 한계 짓는 현실 앞에 어떤 격려와 도움을 줄 수 있을까.이 시점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피곤해서 쉬고 싶은 토요일, 남편의 손에 이끌려 특별 새벽기도회로 향했다. 그간의 힘든 마음과 아이들의 인생 무게에 눈물이 쏟아졌다. 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것이구나. 남은 시간 동안 아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 스러지는 마음을 일으켜 세워 계속 용기를 북돋워 주는 것. 그리고 그들의 가능성을 믿어주고 스스로도 믿을 수 있게 독려하는 것.
17년간 바보로 살았던 빅터는 남들이 붙여준 '바보'라는 딱지로 잠재력과 천재성을 발휘하지 못했다.실제 IQ는 170을 넘었는데 말이다. 그렇게 인생은 내가 나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내 안의 천재성은 외부의 평가나 자신에 대한 부정적 인식으로 사장당할 수 있다.내외부로부터 끊임없이 밀려드는 자신에 대한 불신을 밀어내고 긍정적인 믿음을 갖는 것, 지금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작업인 것 같다.
자기 믿음이란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직관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가능성을 믿는 것이지. 세상에는 자기의 믿음을 방해하는 수많은 방해자가 있단다. 그들은 우리에게 부정적인 프로그램을 주입시켜서 우리 자신을 의심하게 만들지. 그러니까 너희는 최후의 순간까지 자신에 대한 믿음을 버려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