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 집에 가면 안방에 아주 오래된 티비가 하나 있다. 그 티비는 내가 어릴 때 사용하던 티비인데 거실에 새로운 티비를 산 이후로는 방으로 들어가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그 티비는 몇 년 전부터 고장 났는데 여전히 그 자리에 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사실 티비는 티비로서의 역할이 아니라 모자 보관대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티비는 내가 어릴 때 보던 옛날 티비여서 크고 널찍하다. 그 위에 물건을 올려놓기가 좋게 생겼다. 그래서 그 위엔 모자가 켜켜이 쌓여서 보관되어 있다. 모자가 최소 20개는 넘지 않을까? 친정에 갈 때마다 늘 그 모자를 보면서 생각한다. '우리 엄마는 물건에 욕심이 하나 없는데 딱 하나, 모자에는 욕심이 가득한 것 같아'라고 말이다.
어느 날 엄마에게 "엄마~ 집에 모자가 왜 이렇게 많아? 안 쓰는 모자는 정리하는 것이 어때?"라고 물어봤다. "내가 모자가 어딨어~ 그거 몇 개나 된다고~ 그거 다 쓰는 거야! 나중에 나이 들어봐! 모자든 선글라스든 꼭 필요하다니까!"
친정 한 켠 쌓여있는 모자들
엄마에게 그런 말을 했던 것이 무색하게 나에게도 하나둘씩 모자가 쌓이게 되었다. 재밌게도 제주에서만 모자가 2개나 늘었다. 그중 모자 한 개는 제주에 온 지 얼마 안 된 날 엄마와 바닷가에 갔을 때 구매했다. 때는 분명 늦가을 아니 초겨울인데 여전히 바다 햇살은 너무 강하고, 선글라스도 모자도 챙겨 오지 않은 터라 '아이고 모자를 안 가져왔네' 하며 곤란했더랬다. 그런데 재밌게도 바다 바로 앞에 모자 판매 노상이 있었다. 그곳을 지나가다 멈춰 서서 이것저것 써보고 구경하다 하나를 구매하게 되었다. 그 모자는 긴 창을 가지고 있어 얼굴을 전체 가려주는 구조였는데, 모자 아래 끈을 묶어 고정시킬 수도 있어서 바람이 많이 부는 제주에서 사용하기 딱이었다.
그런데 모자의 패브릭이 가을, 겨울 쓸 수 있는 재질이라 여름에 사용할 만한 모자가 필요했다. 작년에 아이가 서울에 가서 모자를 잃어버리고 와서 이번에 새로 주문하게 되었는데, 같은 디자인으로 어른 것도 팔길래 주문할 때 내 여름모자도 함께 주문했다(사진 왼쪽 위)
나의 모자 컬렉션 + 2 다시 - 1
그리고 가진 모자 4개는 역시나 어머님께서 주신 것이다. 여름 모자가 2개, 겨울 모자가 2개이다. 그중 여름 모자 한 개는 수년 전 부산에 갔을 때 사주셨다. 부산에 갔는데 햇살이 너무도 강해 급하게 아이의 모자를 사 오셨는데 그때 그 커다란 모자를 함께 사 오셨다. 그런데 창이 너무 넓어 평소에 사용하기엔 좀 오버 수준의 사이즈였다. 문제는 거의 새것이라 차마 어떻게 하지 못하고 보관 중이었는데 제주에 와서 풀을 깎을 때 쓰니 딱이었다. 창도 넓고 깊숙한 것이 아주 유용하다. 이렇게라도 쓸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른 한 개는 어머님께서 모자를 구매하셨는데 생각보다 모작 사이즈가 작아서 주신 것 같다. 보통 사람보다 두상이 작은 나도 그 모자를 쓰면 머리에 꽉 찬다. 그래도 그 모자는 자전거 탈 때 쓰면 딱이었다. 바람에 날아가지도 않고, 시야도 그렇게 가리지 않으니 좋았는데... 평소엔 머리가 너무 눌리고 얼굴도 가려주지 않아 별로 소용이 없는 것 같다. 이 글을 쓰다가 그 모자를 가져다가 쓰레기 통에 버렸다. 검은색인데 3년 정도 열심히 사용했더니 색이 바랬다. 게다가 모자를 쓸 때마다 창이 넓어 햇빛을 가려주는 것도 아니고, 모양이 멋진 것도 아니고, 이제 자전거를 타는 것도 아니고 이제 그만 쓰고 싶었다.
역시 물건이란 내가 필요한 것을 내가 원하는 사이즈, 컬러, 등등 신중하게 생각하고 사는 것이 좋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한번 더 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오래된 모자는 아이 갖기 직전에 무려, 뉴욕에서 산 라피아 모자이다. 그러니까 이게 산지 적어도 8년은 된 것이다. 컬러는 검정인데 이게 머리에 쓰면 시야를 가리고, 종종 접어서 다녔더니 모양이 잘 잡히지 않아 조금 불편하고 그렇다. 그래서 잘 손이 가지 않는다. 그래도 여름마다 종종 쓰긴 하는데 지금 눈에 가시다. 잘 처분해야 하는데 이것은 왜 이렇게 어려운지 모르겠다. 언제고 또 이런 모자를 살 것 같아서 그렇다.
그리고 사진 외에 여름 수영용 캡 모자 한 개, 같은 모양 다른 컬러 겨울 모직모자 (받은 것) 2개나 있다.
그러니까 현재 내가 가진 모자가 총 7개나 된다. 엄마가 가지고 있는 모자가 많다고 놀라고, 놀렸는데! 그럴게 아니었다. 나란 사람은 머리가 하나인데 모자가 왜 이렇게 많이 필요한 걸까? 근데 또 각각 쓸모가 있으니 바로 정리할 수도 없고, 일단은 가진 모자를 잘 쓰는 수밖에 방법이 없다.
미니멀리스트가 되는 것이 점점 어렵다고 느껴진다.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모자만 해도 7개나 되고, 가진 모자는 이미 계절별로 구분까지 되어 사용 중인데 과연 이게 맞는 걸까?
가장 최근에 산 모자를 살펴보면 여름선캡 모자인데, 여름에는 더우니 선글라스나 모자를 꼭 쓰고 다니는데, 헤드 부분이 있는 모자를 쓰면 더워서 도저히 쓸 수가 없는 것이다(그래서 구매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잘 산 것 같다. 이미 여름이 오기 전인데 요즘도 잘 쓰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가진 선글라스는 1개라는 것이다.
그래도 자고로 미니멀 리스트라고 하면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을 모자 한 개로만 써야 할 것 같다. 필요하다고는 하지만 똑같은 용도의 물건을 여러 개 가지고 있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이 든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앞으로 더 이상 모자를 2개까지 줄이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지난가을에 산 모자는 봄, 가을, 겨울에 쓰기 딱이고 이번에 산 선캡은 여름에 필수품이기 때문이 때문에 이것 두 개는 남겨야겠다. 그렇다고 지금 모자가 많다고 잘 쓰고 있는 것들을 버릴 수 없으니 가진 것은 앞으로 끝까지 잘 써야겠다.
이것은 모자가 예시였던 것이지 모든 물건에 마찬가지인 것 같다. 같은 용도의 물건의 품목을 줄이는 것이 미니멀 리스트가 되기 위한 중요한 포인트 같다. 지금 당장 모든 것이 완벽한 미니멀이 될 수는 없겠지만 하나씩 노력하다 보면 언젠간 단출한 살림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날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