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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lair Jul 21. 2023

그래도 좋은 건 어쩔 수 없어

그 집에서 영원히 살 것이라는 착각을 했다. 동시에 영원히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실로 오랜만에 드는 안정감이었다. 그러니까 그 정도로 커다란 마음이 들었는데 겨우 계약기간 2년을 가까스로 채워 살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 공간, 사람들 그렇게 마음에 들어보기는 처음이었는데 떠나자니 정말 아쉬웠다.



그곳은 나에게 최고로 안락한 거주지이었다. 그동안 철새처럼 살아가던 삶을 마침표 찍고 싶다는 생각을 다. 깔끔한 아파트, 안전한 주거환경, 나이스한 이웃들, 게다가 주위 놀이터, 상권 등등 아이를 키우기에도 완벽했다. 뭐 하나 부족한 것이 없었다.  



그곳에서 많은 사람을 알고 만나게 되었다. 아이 덕분이었다(때문이 아니라 덕분에 라고 생각할 정도) 성격 탓에 많은 사람과 모두 친해질 수 없었지만 만났던 사람들 거의 대부분이 참 좋았다. 단지 아이를 통해 만나게 된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아이 친구 엄마는 내 친구가 아니야'라는 생각을 하고 살았다.









얼마 전 제주에 다녀갔던 친구가 있다. 내가 그렇게 오래도록 살고 싶었던 곳에서 만났던, 열 살이나 많은 언니이다. 언니를 처음 봤을 때 느꼈던 솔직한 감정은 '어려운 사람이다. 절대로 가까이 지내지 말아야지' 이런 마음이었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몇 개월 후 제일 친하고 가까운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그곳에서 지내던 동안 나는 내 마음을 다 주었다. 겨우 2년이라는 기간 동안 이 정도로 친해진 사람은 어른이 되어 처음인 것 같다.



언니는 만나면 만날수록 나와 결이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랑 닮은 점이 많았고, 아이를 셋이나 키워서 그런지 가진 에너지가 많지 않은 게 나랑 비슷했다. 아이들을 편하게 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때마다 최선을 다하는 모습도 좋았다. 무엇보다 내 마음이 가는 것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도 그때는 조금은 어려운 사이라 만나고 돌아오면 모든 진을 다 빼고 오는 기분이 들기는 했지만 그것조차 너무 좋았다(원래 누굴 만나도 그렇다) 게다가 아이들 유치원 하교하면 매일같이 놀이터에서 얼굴 보는 사이였으니 얼마나 친해졌겠나. 나중에는 아이들 학원을 같이 보내기도 했다. 어른이 된 나는 이제 싫으면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슬금슬금 피하고, 못 만나고 못하는데, 언니랑은 뭘 하든 마음이 잘 맞았다.



최근 몇 년간 만난 사이 중에 이만큼 좋아해 본 사람이 없었다. 게다가 현재 나에게 남아있는 인연의 대부분은 모두 최소 10년, 15년은 넘은 친구들이 많아서 그런지 솔직히 앞으로 새로운 사람을 알게 된다고 해도 과연 그렇게 오랜 기간만큼 인연을 유지하는 것이 가능할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언니는 오랫동안 인연을 유지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사람이었다.




'어쩔 수 없이 좋은 사람'   




그런데 제주도로 이사를 할 결심을 하고 나니, 더 이상 이 관계를 계속 지속할 수 없음이 아쉬웠다. 친구관계도 몸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지는 법. 당연히 이사를 한 후에 만날 수 있는 시간은 하늘의 별따기였다. 버스도, 기차도, 자동차도 아니고 비행기를 타야만 만날 수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작년 제주에 일 년 동안 살면서 서울을 간 게 한번뿐었으니 당연히 멀어질 수밖에...



그런데 이게 웬걸! 언니의 동생이 나와 비슷한 시기에 제주에 살게 되었다. 그리고 다른 이유로도 언니는 몇 달에 한 번씩 제주를 오가게 되었다. 그때마다 언니와 만날 수 있었다. 이런 운명 같은 인연이 다 있다니! 제주에 사는 기간 동안에 우리 사이는 더욱 깊어졌다. 특히 오랜만에 한 번씩 만나는 아이 들이도 같이 놀기에도 좋았고, 잘 맞았다. 그것도 좋았다.



나이가 점점 들어가며 이렇게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좋아하는 인간관계는 만들지 못할 줄 알았다. 특히 아이 친구 엄마에게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친구야 한잔하자!







최근에도 같은 생각을 했었다. 언제 떠날지 모르는 제주에서 엄마들의 만남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매년 새롭게 갱신되는 유치원, 학교, 반... 내 친구도 아니고 매년 바뀌는 아이 친구들의 엄마들을 만나며 현타가 왔던 것도 사실이다. 결국 우리가 전학 가고, 이사 가면 끊어질 사이가 아닐까 생각했다.



평소에도 사람을 분별해 만나는 것은 인지하고 있었기도 하고 그 이유가 있긴 했다. 특히 최근에. 새로운 만남을 갖고 싶지 않았던 것은, 결이 다른 사람을 만나 맞지 않는 것을 억지로 맞추려고 한다는 생각을 들게 되고, 때로는 누굴 만나는 것조차 시간을 허비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별 의미 없는 사람에게 상처받는 것도 싫어서 더욱 그래왔던 것이다. 



그런데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시절인연으로 끝날 줄 알았던 사람 중에 저절로 마음이 가고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서, 어쩌면 다른 누군가도 이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잘 지낼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글을 쓰다가 오랜만에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동안 톡으로는 못 나눈 얘기를 나누며 안부를 물었다. 전화를 끊고 나니 심장에 미세한 빠른 박동이 느껴졌다. 마치 남자친구와 연애하던 시절 느끼던 설렘과 비슷하면서도 미묘하게 달랐다. 그 순간 확신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어쩔 수가 없구나. 내가 마음을 주지 않으려 노력해 봐도 저절로 마음이 가고야 마는 상태가 되는구나!



이제는 그동안 생각했던 '시절인연'에 대해서 그리고 가지고 있었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겠다 생각했다. 사실 그동안은 인간관계에  한계를 지어놓고 넘어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앞으로는 나이가 들어도, 내가 어디에 살고 있던지, 또 금세 떠날지라도, 어디에서든 마음 가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놓고 살아야겠다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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