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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lair Jul 18. 2023

미뤄둔 행복

여름 이불

오랜만에 도심으로 나가서 은행일도 보고, 다이소도 들리고 마트도 다녀올 일이 있었다. 지나가는 길에 좋아하는 생활용품 매장이 여름 세일을 하고 있었다. 세일은 매번 하긴 하지만 오랜만에 한번 둘러볼까 하는 마음으로 들어가 보았다. 지금 집에서 쓰고 있는 수건, 잠옷, 베개가 등등이 낡아져 바꿀 때가 한참 지났던 터라 괜찮은 것이 있으면 바꿔볼까? 하는 마음이었다.  



세상에나! 아줌마들의 신세계는 역시 생활용품 매장인가 보다. 깨끗한 수건, 다양한 디자인의 잠옷, 감촉도 좋고 시원한 이불, 베개 등등 그곳에 파는 모든 것들이 탐이 났다. 사실 요즘 사야 할 것이 많은데 조금씩 미루고 있었던 것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막상 매장에 들어가 보니 무엇을 먼저 사야 할지, 또 종류도 많아 무엇을 사면 잘 샀다고 할지 더욱더 고민이 되었다.



그러던 도중에 눈에 띈 것은 이불이었다.

여름 이불.



바로 얼마 전까지도 제주 집은 추워서 사계절용 이불을 덮고 잤다. 원래는 사계절용 이불을 정말로 사계절 내내 덮고 자야지 하고 생각했다. 봄, 가을에는 하나씩 덮으면 되고 겨울에는 집이 추워서 사계절 이불을 두 개 정도 덮고 자면 딱 맞았다. 그런데 문제는 여름에 덮기엔 두꺼웠다. 여름이 된 이후에도 계속 사용하고 있긴 한데 막상 덮고 자기엔 무겁고 두껍고, 그러자고 치워버리기엔 아쉬웠다.



그리고 사계절용 이불이 어쩌다 보니 4개나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두 개는 원래 가지고 있던 것, 하나는 시댁에서 또 다른 하나는 이곳으로 이사 오는 날 당일 덥고 잘 이불이 없어 엄마 가져다 주신 이불. 사계절 이불이 4개는 많은 듯해서 그 이불 중 한 개는 정리해야지... 정리해야지 했는데 막상 정리하려고 보니 아직은 쓸만한 상태라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일런 생각은 물건을 계속 버리지 못하게 만든다)



아무튼 사계절 이불 말고는 여름이불은 없었다. 물론 아이 것으로 작은 사이즈가 두세 개 있긴 다. 그동안 여름에 뭘 덮고 잤지? 생각해 보니 우린 여름에 이불을 덮은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긴 했다. 작년에는 어떻게 했지? 도대체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래서 여름 이불은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최근에서야 여름에도 이불이 필요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제주는 종일 습하다. 최근에 장마가 계속되다 보니 도 습하고 저녁에도 습하다. 그러나 저녁은 습하기도 하지만 대신에 시원한 바람이 분다. 그래서 에어컨을 틀기도, 창문만 열기에도 애매한 상태. 게다가 문제는 또 깊은 새벽이 되면 바람 때문에 춥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름이 된 후 당분간은 아이 것을 덮고 잤는데, 아이 이불이라 사이즈가 작아 두 개 세 개를 덮고 자야 했다. 그렇게 누덕누덕 며칠 지내다 보니 제대로 된 여름 이불이 하나쯤 필요했다.



그래서 간 김에 여름이불을 골라봤다. 피부가 예민한 편은 아닌데 재질은 면 100%를 선호하는 편이다. 그러니까 보통 여름용이라고 나온 이불은 나에게 맞지 않다. 그 시원한 재질이라는 폴리나 인견 등등의 느낌을 끔찍이도 싫어하기 때문이다. 차라리 안 덮고 자고 말지...



그런데 한 면은 면, 한 면은 시원한 재질로 된 양면 이불이 눈에 띄었다. 마침 여름 세일기간이라 30% 할인가도 적용되었다. 한참을 만져보고 뒤적거려 보고, 펼쳐서 사이즈도 보니 딱이다. 이게 제격인데? 단번에 갖고 싶다는 마음이 들썩였다. 그러나 역시 구매는 조금 더 생각해 봐야겠지? 게다가 이 매장에서 다른 것도 살게 많기 때문에 고민이 되었다.

 








미니멀하게 사는 것은 만족스럽다. 여전히 귀엽고, 새로운 물건을 보면 흔들리긴 하지만... 불필요한 물건을 최대한 사지 않으려 노력하며 지내다 보니 이제는 사고 싶은 것이 거의 어지긴 했다. 그렇게 사는 게 만족스럽냐 물어볼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나는 분명 괜찮다. 워낙 물욕이 넘치던 사람이었는데 이렇게 살다 보니 원래부터 이렇게 살았던 것처럼 익숙해졌다.



그러나 그러다 보니 현재 잘 사용하고 있는 물건들을 구매하는 것에 대해서 조차 인색해졌다. 분명 당장 바꿔도 이상하지 않을 물건인데 '조금만 더 쓰다 바꿔야지, 이사 가면 바꿔야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떤 면에서는 알뜰하기도, 환경을 생각하게 되었고, 어떤 부분에서는 분명 미뤄둔 행복이었다.



다음번에 사야지, 조금만 버텨야지, 이사를 가면 사야지, 제주를 떠나면 그때는 다 버리고 새것으로 사야지!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마음으로 모든 것을 장만해야지. 이렇게 생각하며, 갖고 싶고 바꾸고 싶은 마음을 눌러가며, 미뤄가며 지내왔기 때문이다.



몇 년 전에도 한번 꼭 이랬던 때가 있었다. 작은 집에 살던 시절에는 갖고 싶은 물건을 볼 때면 꾹 참고 '넓은 집에 가면 사야지' 이런 생각을 정말 많이 다. 작은 집에는 물건을 둘 공간도 많지 않았고, 게다가 아이가 어려 육아 용품이 얼마나 많았던지. 그런데 그러다 이사 간 넓은 집에서는 막상 갖고 싶었던 그것들을 한꺼번에 다 살 수가 없었다. 그것을 다 사자니 이사 비용, 집 비용과 더불어 매달 나가는 지출 비용이 상당했던 지라 추가로 모든 것을 새것으로 구매하자니 부담이 되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살 수 없었던 것이 반, 그리고 다른 반은 이제 더 이상 그 물건이 별로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니 넓어진 집에 적은 물건으로 살아가는 재미도 분명히 있었다. 넓어진 공간, 여백의 미를 즐기게 되며 그때부터 물건에 조금 자유로워졌던 것 같다.







그러나 필수품처럼 사용하고 있던 물건들, 낡고 오래되어 교체해야 하는 것들도 미뤄두고 나니 이건 아니다 싶었다. 특히 우리의 삶의 질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구매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어 집을 슬쩍 둘러보니 미뤄둔 행복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래서 여름이불을 하나 구매했다. 여름 이불 하나 사는데 이렇게 구구절절할 일이야? 싶지만 이제 우리의 소유로 들어오는 물건은 분명히 그렇다. 정확히 하고 넘어야 할 문제인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다시 원래의 맥시멀 라이프도 순식간에 돌아가버릴 테니까.



새로운 여름이불. 고민하던 며칠 새에 더 덥고 습해져 에어컨을 틀어놓고 그 이불을 덮으니 딱이다. 게다가 이불을 사고 보니 시원하고도 부드러워 삶의 만족도가 훨씬 커졌다. 한참을 고민하고 고심하다 구매한 물건에 더욱 만족하고, 매번 기쁜 마음으로 사용하고 있다. 앞으로는 매일 사용하고 자주 쓰는 물건에는 절대 아끼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된다. 더 이상 미루지 말아야지.




여름 이불 세탁





그동안 이런저런 행복들을 미뤄뒀었다. 그런데 최근에 그중에 가장 기다리던 커다랗고, 위대한 행복이 한여름밤의 꿈처럼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문제는 그렇게 기다리던 행복이 언제 또다시 찾아올지 더 이상 장담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번 일을 통해 깨달았던 것은 아주 큰 행복만을 좇다 보며 살다 보니 작고 귀여운 행복들은 뒤로 미뤄왔다는 사실이었다. 소소한 행복으로 하루하루 살아갈 힘을 얻어야 하는데, 그것들을 모두 뒤로한 채 한 방의 행복만을 쫓아오다가 허무해진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마음을 조금 바꾸기로 결심했다.



더 이상 커다랗고 거대한 행복을 기다리기엔 지쳤으니 당분간은 일상의 작은 행복을 찾으며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음 주에는 색이 바래고, 건조기에 돌리고 돌려서 낡아버린 수건도 바꿔볼까 한다. 더 이상 행복을 미뤄둘 수는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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