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에세이
카메라는 고요히 퍼스트 리폼드 교회를 정중앙에서 위로 올려다본다. 밖은 음산한 빛이 감도는데 하얗고 뾰족한 건물이 단단하게 서 있다. 뾰족한 첨탑이 하늘을 찌르고, 그 깨끗한 색채는 주변의 잿빛과 대조되어 묘한 위화감을 자아낸다.
마이클의 마음은 지구가 부서지는 소리에 불안하다. 그래서 자신의 아이가 세상에 나오는 것조차 반길 수 없다. 메리는 남편 마이클의 상담을 위해 톨러 목사를 찾는다. 마이클은 목사에게 세상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자신의 고뇌를 털어놓는다. 그러나 톨러는 마이클에게 자신의 내면을 더 깊이 들여다보라고, 그 속에서 삶의 희망을 찾아보라고 말한다. 대화가 흐를수록 마이클의 절망과 안타까움은 안면의 신경을 미세하게 마비시켜 떨림과 굳음을 반복한다. 톨러의 전사한 아들 이야기를 들었을 때, 흔들리던 눈빛을 이내 진정시키며 "이름이 뭐냐?"라고 묻는 마이클의 온기가 아직까지 느껴진다. 절망의 순간에도 타인의 고통에 함께 아파할 수 있는 마이클의 태도에 내 뇌 속을 흐르던 이성은 사르륵 녹아버렸다.
누군가 "세상이 좀 흔들리지 않아요?"라고 물으면, 다른 누군가는 말한다. “똑바로 서야지. 그리고 너 자신을 돌아봐.” 그들을 나약하고 어두운 구석으로 몰아넣고서 '세상의 빛을 왜 못 보냐'라고 다그친다. 사실, 하얗고 뾰족한 교회도 우리를 내려다보며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종교나 국가는 개인에게 많은 것을 강요한다. 그 방식은 매우 자연스럽지만 내용은 꽤 모순적이다. 톨러 목사는 실직자의 딸을 위로하며 "믿음에서 돈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지만, 한 청년은 "교회가 루저들의 종교인가요?"라며 되묻는다. 사람들에게는 현실을 초월한 고결함을 강요하면서도, 교회는 환경을 파괴하는 에너지 기업의 후원을 받는다. 영화 속 교회의 이름이 '풍성한 교회'인 것은 이런 아이러니를 상징한다.
사실 톨러도 '강요받는 자'다. 교회 운영을 위해 신념을 꺾어야 하고, 나라가 필요로 할 때는 으레 아들을 전장에 보냈다. 주검이 되어 돌아온 아들을 보며 느꼈을 혼란감에 삶이 통째로 흔들렸을 것이다. 그 당혹감은 거대한 슬픔의 파도에 가려 잠시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파도가 잠잠해진 후 드러난 혼란에 그의 영혼과 육신은 이미 만신창이가 돼 있었다. 우리를 억누르고 있는 수많은 가치들이 얼마나 모순적인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톨러도 마이클과 메리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마이클의 '의도적인 죽음' 이후, 톨러의 신념에는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메리와 함께한 '신비한 마법 여행'은 인간이 어떻게 신념을 넘어 타인에게 공감하며 우주의 관점을 가질 수 있는지 보여준다. 그 순간 메리는 지구가 보낸 '메신저' 같기도 했고, '지구 자신'인 것도 같았다. 그 여행에서 톨러가 본 것은 지구라는 커다란 생명체가 인간에게 보내는 메시지였다. 커다란 생명체의 울부짖음이었다. 그 여행을 위해선 상대와 관절을 맞대고 같은 리듬으로 숨을 쉬며 최대한 하나가 되어야만 한다. 무엇이 그 ’ 신비한 체험‘을 가능케 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영화 속에서 줄곧 희미하게 흐르던 한줄기 ‘사랑’이 보였다. 몸을 밀착하고 호흡마저 함께하는 사랑이 있어야만 ‘신비한 마법 여행’이 가능하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스스로에게 너무 많은 짐을 지워버렸다. 퇴근길에 대리운전을 하면서도 부자가 되지 못한 자신의 무능을 탓하고, 부당한 괴롭힘에 직장을 그만두면서도 스스로의 나약함을 자책한다. 세상의 부조리함은 어느새 당연하다 못해 '정당성'까지 가져버렸다. 이곳에서 버텨내는 것은 온전히 개인의 몫이 됐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지진이 나도 '땅이 흔들린다'라고 말하기 어려운 세상이다. 스스로의 나약함만 드러내는 꼴이 된다. 남들은 물론 가족들조차도 약한 소리 말고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다그칠지 모른다. 그렇게 나약해서는 가족을 건사할 수 없다고... 그 순간 마주할 절망감에 사람들은 이미 가늘게 늘어진 어떤 줄을 놓아버릴지도 모른다.
하나 마이클의 죽음은 그런 절망감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무너지지 않았다. 마이클은 절망적인 세상에 소리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유골이 되어서도 칠흑 같은 오염 지역에 홀로 남겨지고자 한 강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죽음으로 세상에 더 크게 외치고 싶었을 뿐이다. (교회가 금기시한 자살을 선택한 것은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강한 외침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영화 마지막에서, 톨러 역시 부러진 신념과 그로 인한 절망 때문에 마이클처럼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그를 구원한 것은 메리(와 뱃속의 생명)였다. 톨러와 메리의 마지막 키스는 '사랑'을 상징한다. 메리에 대한 사랑이고, 생명에 대한 사랑이자 우주에 대한 사랑이다. 그러나 메리를 껴안을수록 스스로 감아둔 가시 철선이 톨러의 살을 파고든다. 그 철선은 고통을 수반하는 사랑의 양면성일까? 어쩔 수 없는 인간의 굴레일까? 아니면 세상을 향한 톨러의 단호한 결의일까?
어린 시절 이런 상상을 하곤 했다. 온 세상이 무너져 버릴 때 누군가 하늘에서 내려와 우리를 구원해 주는 상상. 그래서 착하게 살아야겠다고 어린 다짐을 하곤 했다. 영화를 보며 정말로 그런 마지막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나 환경 문제를 인지하고 있지만 그 심각성을 잊고 산다. 마치 스릴러 영화 같은 음산한 분위기는 문제의 심각성을 일깨워 준다. 그리고 무너져가는 세상에서 다시 설 수 있는 희망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내가 찾은 힌트는 '사랑'이었다. 그 사랑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너무도 숭고하지만 이미 식상하고, 누구나 알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그리고 너무 달콤하지만 너무도 아프다. 이 사랑이 자신의 경계를 넘어 타인과 세상을 향할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그러나 이 사랑을 또다시 개인만의 의무로 치부하기는 싫다. 본래의 가치를 잃어버린 종교가, 이익을 위해 전쟁도 불사하는 국가가, 우리의 터전마저 파괴하는 기업들이 가져야 할 '태도'이기도 하다. 사랑이 기반이 된 태도가 제도가 되고, 문화가 되었을 때 사람도 살고 지구도 살 수 있다. 거창할 필요도 없다. 사소할수록 좋다. 미묘하게 변한 분위기가 사회의 제도가 되고 문화가 된다. 이 영화가 만든 내 안의 작은 균열도 나의 삶의 형상을 조금씩 바꿔놓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