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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사소한 것들 — 빛이 닿지 않는 곳의 크리스마스

영화 에세이 - ‘이처럼 사소한 것들’과 ‘어쩔수없다’를 나란히 보다

by 분의일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어느 겨울,

빌은 수녀원 석탄창고에서 들려오는 여자의 울음소리를 듣는다.

“도와주세요.”

그 한마디는 살얼음 같던 그의 일상에 작은 균열을 일으킨다.

집에 돌아온 빌은 아내에게 그 일을 말해보지만,

“우리 애들이 아니잖아요. 신경 쓰지 마요.”라고 말한다.

그녀도 가족을 위해 진심을 다하는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빌은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평범한 가장이다.

하지만 그의 어린 시절은 그리 평범하지 않았다.

그는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윌슨 부인의 도움으로 부인의 저택에서 자랐다.

부인은 집안일을 돕는 빌의 어머니에게도, 빌에게도 자비로웠다.

그러나 부인은 빌이 원하던 크리스마스 선물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리고 부인의 아들은, 빌의 어머니와 은밀한 관계였다.


빌의 회상 신은 아지랑이 가득한 빛 속처럼 몽환적이다.

그 기억은 흐릿하게 번지며 마치 나의 어린 시절을 들여다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살짝 가늘게 뜬 눈에 힘을 주고 그 장면 속으로 들어가면

수녀원의 위선과는 또 다른 형태의 위선이 보인다.

빌의 가족은 그 저택에서 보호받았지만, 동시에 착취당했다.

그 기억은 어린 빌의 내면에 짙은 그림자를 남겼다.

세월이 흘러, 그는 수녀원에서 학대받는 세라를 발견한다.

그가 세라에게 내민 손은 어쩌면 어릴 적 어머니에게 내밀지 못했던 손일지도 모른다.


[다시 영화를 보니, 앞의 두 문단은 나의 오해였던 것 같다.

처음엔 네드가 윌슨 부인의 아들인 줄 알았지만, 그 또한 윌슨 부인의 농장 직원이었다. 아마 빌의 아버지라 짐작된다. 빌 폴롱과 아일랜드 특유의 우울한 표정들이 겹쳐 보이면서 생긴 착각이었던 것 같다.

처음엔 감독이 소설 속의 따뜻한 윌슨 부인을 조금은 가식적인 인물로 바꾸어, 당시 상류층의 위선을 드러내려 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라는 제목처럼, ‘작은 선행이 대물림’되는 이야기로 보는 편이 더 맞는 듯하다. 윌슨 부인에게서 받았던 사랑을, 빌이 다시 창고 속 사라에게 건넨 것이다.

그래도 굳이 그 착각을 완전히 지우고 싶진 않다. 사랑은 꼭 받아야만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오히려 상처받은 사람들이 더 깊이 타인을 사랑할 때도 있다.]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동명 소설에서 출발했다.

수녀원에서 미혼모들을 강제로 노동시키고, 아이를 빼앗았던 ‘막달레나 수녀원’ 사건.

그 시절, 종교는 침묵했고 사람들은 외면했다.

감독은 그 이야기를 ‘크리스마스’라는 시간 위에 올려놓는다.

빛의 계절이지만, 그 빛이 닿지 않는 곳의 어둠은 더욱 짙게 보인다.


세상을 잔인하게 만드는 건 거대한 악이 아니다.

매일의 무관심, “나만 아니면 돼.” 하는 이기적인 마음에서 출발한다.

“자신의 아이들이 아니니 신경 쓰지 말라.”는 빌 아내의 말은 영화 ‘어쩔 수 없다’의 만수(이병헌)의 대사와 닮아 있다.

모두가 AI로 대체되는 공장에서 “그래도 공장에 관리할 사람 한 명은 필요하겠지.”라고 말하던 만수의 말에는

‘나만 아니면 된다’는 이기심, 그리고 그 마음을 정당화하는 일상의 합리화가 담겨 있다.

‘악의 평범성’은 바로 이런 순간에 고개를 든다.


영화 ‘어쩔 수 없다’의 만수는 평범한 가장의 얼굴이었다.(악의 평범성)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의 빌 폴롱 역시 평범한 가장이다.(영웅의 평범성)

빌의 용기는 거창하지 않다.

그저 외면하지 않겠다는 마음, 그 사소한 결심 하나가 수녀원 창고 속 어둠에 불을 밝혔다.


누군가의 ‘작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

돌이켜보면 늘 핑계가 있었다.

“요즘 바빠서.”

“나도 힘들어서.”

“이건 어쩔 수 없잖아.”

정말로 어쩔 수 없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누군가는 그 ‘어쩔 수 없음’을 깨뜨린다.

그 한 사람의 사소한 용기가 위태로운 세상을 붙잡는다.


빌이 세라에게 손을 내민 순간, 그의 내면에서 오래된 기억들이 겹친다.

수녀원의 어둠과 크리스마스의 불빛, 착취와 자비, 번뇌와 해방이 뒤섞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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