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에세이 - 희망과 절망사이
어제 나스닥이 3.6% 하락했다. 내 심장은 폭락했다.
주식할 때는 일희일비하지 않아야 한다는데, 쉽지 않은 일이다.
요즘처럼 돈벌이에 진심인 적이 없다.
쉬는 날을 줄여가며 일을 하고, 커피값을 아껴가며 투자를 한다.
과학의 발전이 속도를 높일수록 미래에 대한 희망보단 두려움이 앞선다.
그 두려움이 커지는 만큼 돈벌이에 속도를 높이는 중이다.
주인공 알리시아는 서사학자다.
이야기를 연구하지만,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 이성적 관찰자다.
그래서 자유를 얻기 위해 세 가지 소원을 들어줘야 하는 지니에게 소원을 빌지 않는다.
그녀는 “욕망이 비극을 부른다”라고 믿는 듯하다.
욕망은 희망의 또 다른 이름이다.
“희망은 인간을 잠식시키는 가장 위험한 고문이다.”
성해나의 단편소설 『구의 집』에 나오는 문장이다.
그 소설 속 고문실에는 창문이 있다.
빛이 보이지만 나갈 수 없는 고문실의 창문은 더욱 절망적이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꿈을 향해 기를 쓰고 달려가는 입장에서 부정하기 힘든 말이다.
우리는 미래를 위해 기꺼이 현실을 희생한다.
좋아하는 것을 참기도 하고, 가면을 쓰기도 한다.
평생 안 맞는 옷을 입고 살다가 죽기도 한다.
지니는 알리시아에게 자신이 수천 년 동안 겪은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그리고 그녀는 조금씩 이야기 속으로 빠져든다.
집으로 돌아온 알리시아에게 이웃집 할머니들이 담 위로 인사를 건넨다.
“하늘엔 새가 날고, 바다엔 물고기가 사는 것이 과학적으로 맞다”며 이민자들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는 할머니들에게 알리시아는 말한다.
“사람은 어디든 살 곳을 정할 수 있다”라고…
알리시아도 어느새 이야기를 믿고 있었다.
이웃집 할머니들이 말하는 과학은 ‘당위’에 대한 증명이다. 곧 닫힌 결말이다.
A 부모에게서 태어난 아이는 A-1로 살아가는 게 당연하고,
B라는 환경에서 태어난 인간은 선택의 순간 B-1의 선택을 하는 게 당연하다고 증명되는 순간,
인류에게 희망은 사라진다.
반면 이야기는 열린 결말을 상징한다.
무엇이든 가능한 희망이다.
내게도 희망이 있다.
그런데 그 희망은 자주 나를 힘들게 한다.
그럼에도 언젠간 내게도 지니가 찾아올 거라는 희망을 갖는다.
인공지능의 무서운 발전으로 열린 문들이 닫혀버릴지도 모른다는 조바심에 아등바등하면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희망은 오히려 절망의 한가운데에서 피어난다.
아이러니하게도 과학을 맹신하는 지금도 사람들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우리는 희망을 미래에 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것은 현재를 지탱하기 위한 가장 현실적인 도구다.
픽션도 그렇다.
언뜻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하는 듯하지만, 실은 가장 진실에 가깝다.
현실에 가려진 진실은 오히려 판타지 속에서 솔직한 표정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알리시아도 그래서 지니의 이야기에 공감하게 된 걸까?
오히려 사실을 이야기하는 논픽션이 판타지 같기도 하다.
에세이의 선별적 진실, 실용서의 과장된 표현, 혹은 뉴스의 자극적인 내용들이 오히려 세상을 환상으로 둔갑시킨다.
그 왜곡들은 아주 작거나 그럴듯해서 사람들이 속아 넘어가기 쉽다.
내가 좋아하는 에세이 『쓸만한 인간』의 작가, 박정민 배우는 “에세이는 다 거짓말이라 잘 안 읽는다”라고 말한다.
그 말을 그냥 웃어넘기지는 못하겠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야기도 이미 짜여진 판 안에서 정해진 결말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아닐까?
우리의 상상력 역시 경험과 언어라는 우물 안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지 않은가!
결말이 정해지기 전(이야기가 끝나기 전)에 한 계단이라도 더 올라가려는 나도 대한민국의 어느 시골에서 태어나던 순간 이미 한계가 정해진 운명일지도…
이게 진실일지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며 오늘도 나는 주식 창을 켠다.
기도를 해본다. “저도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세요. 아니 하나만이라도.”
나스닥이라는 신화는 매일 나를 시험에 들게 한다.
갈피를 못 잡겠다.
환상이 현실이 되고, 현실은 환상이 되기도 한다.
희망과 절망을 오간다.
꿈인가 현실인가?
……
주가가 또 하락한다. 내 주식만 폭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