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에세이 - 엑스 마키나
내가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행운(幸運)이다.
그렇게 생각하려 노력 중이다.
아니다. 미적분을 이해하지 못하는 머리와 부실한 허리로 태어났으니 그냥 운(運)이라고 말하는 정도가 좋겠다.
그 운이 좋은지 나쁜지는 아직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다.
아니, 결론이 나지 않았다고 믿는 중이다.
그래서 광둥어 단어도 외우고 식단 관리도 하면서 운을 개척하는 중이다.
미래(삶)가 결정됐다고 보는 결정론(운명론)과 그렇지 않다고 보는 비결정론 사이 어딘가에서 고군분투 중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그 답을 알 수 있을까?
아마 죽을 때까지 모를 것이다.
이미 발생한 교통사고 앞에서는 결정론을 믿으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값이 오르는 자신의 아파트를 보면서는 스스로의 결단을 추켜세우며 비결정론을 믿으며 산다. (양립 가능론?)
결국 ‘우리의 삶이 결정된 것인가?’라는 질문은 답을 찾는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믿느냐 하는 선택의 영역이다.
영화 속에서, (로봇인) 에이바가 자신을 좋아하게 프로그래밍됐는지 의심하는 칼렙에게 네이든은 ‘잭슨 폴록’의 그림을 보여준다.
에이바를 특정 의도를 가지고 프로그래밍한 것은 맞지만, 폴록의 그림처럼 그 창조의 결과는 자신도 예측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는 ‘전자의 위치는 정확히 정해진 것이 아니라 확률로만 존재한다’는 ‘양자역학’과 닮아 있다.
양자역학이 발표된 지 100년이 되었고 잭슨 폴록의 드리핑 기법이 탄생한 지도 80년이 되어간다.
그 사이 눈부신 발전을 이룬 인류는 영화의 제목처럼 ‘기계로부터 온 신(Deus ex machina)’이 되어가고 있다.
우리가 만든 창조물은 인간의 지식을 학습하고 인간의 행동을 모방하고 있다.
로봇과 결합된 AI는 직접 경험을 통해서도 많은 지식을 얻을 것이다.
이미 AI는 우리보다 수학도 잘하고 코딩도 잘한다.
글도 나보다는 잘 쓴다.
머지않아 인류의 지적 능력과 신체적 능력은 물론 모든 능력을 뛰어넘을지 모른다.
어느 인터뷰에서 감독이 말했듯 그가 바라보는 인공지능에 대한 시선은 부정적이지 않다.
오히려 삶의 질을 향상할 도구 정도로 생각하는 듯하다.
그의 생각엔 우리가 (인공지능을 가진) 로봇을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엿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결말은 섬뜩하다.
앞서 언급한 인터뷰를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듯 감독이 결말을 통해 보여주려 하는 것은 로봇에 대한 혐오나 위험성이 아니다.
오히려 로봇인 에이바의 탈출을 통해 인간의 욕망(자유의지)과 여성 해방에 대해 이야기한다.
언어 능력도 없고 신체적 봉사만 하는 일본 여성의 모습을 한 쿄코를 통해서는 성적 대상화와 오리엔탈리즘을 비판하는 듯하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감독의 고뇌와 겸손이 느껴진다.
그러나 이런 SF 영화를 볼 때면 가끔 불편할 때가 있다.
인간의 가치나 의미를 다른 생물에 심지어 로봇에 까지 투영시킬 때다.
이 영화의 에이바가 찾으려는 ‘자유’도, 영화 <블레이드 러너>(1982)의 레플리컨트가 갖고 싶어 했던 ‘기억’도 사실 인간 정체성의 요소다.
과연 그들에게 인간의 정체성이 필요할까?
오히려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로봇을 보며 ‘만물의 영장’이라는 ‘오만한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건 인간이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 너무 커서일까?
모든 것을 인간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은 ‘과도한 인간 중심주의’ 혹은 ‘나르시시즘’으로 보인다.
앞으로 로봇이 갖게 될 생각이나 욕망을 우리가 알 수 있을까?
그런 게 있기는 할까?
어디로 튈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마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는 곳에 가 있지 않을까?
마치 잭슨 폴록의 그림처럼.
그래서 난 두렵다.
로봇보다 수학을 못해 두렵고, 그보다 글을 못 써 두렵고, 그보다 못생겨서 두렵고, 그보다 힘이 세지 않아 두렵고, 그보다 느려서 두렵고, 그보다 빨리 죽을 거라 두렵다.
무엇보다 멈출 수 없는 인간이 두렵다.
그래서 결국 통제 불가능할 그들이 두렵다.
핵폭탄은 우리 스스로만 통제하면 됐을지 모르지만 로봇은 다르다.
우리는 스스로의 미래를 확률 게임에 맡긴 듯하다.
양자역학을 반박하며 아인슈타인은 말했다.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인류가 자신의 미래를 모르는 것을 보니 혹시 신을 만들어 버릴지는 몰라도 신이 되지는 못할 것 같다.
그저 태양을 향해 날아가는 이카루스 같다.
‘기계로부터 온 신’은 네이든이 아니라 에이바인가 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우리의 선택을 믿어 보는 수밖에…
칼자루는 로봇이 쥘 것이다.
우리 인류는 운명(殞命)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