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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기영 Oct 26. 2023

12. 친구의 등판

추억에서 건진 단상

그날은 바람이 제법 불었던 것 같다.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에 재학 중일 때였을 것이다. 그날 학교에서 기분이 좋지 않은 일이 있었, 때마침 불어오던 온몸을 휘감는 바람은 우울한 기분을 더 악화시켰다. 혼자 운동장을 터벅거리며 가로지르는데 듬직한 체구의 같은 반 친구가 자전거를 타고 와 내 옆에 섰다. "자전거 태워줄까?" 나는 소리 없이 고개만 주억거렸고 힘없이 뒷자리에 올라탔다. 친구는 이야기 없이 달리기만 하였고 나 친구의 옷자락을 부여잡고 말없이 앉아 있었다. 친구의 몸을 거쳐 내 얼굴을 스쳐가는 바람 자전거 타기 전과는 다르게 우울함을 푸득푸득 벗겨내고 있었다. 집에 다 와 가기까지 서로 말은 없었지만 뒤에서 바라보는 친구의 등판 넓어 보였고, 내 눈에 가득 찬 친구의 등판은 내가 보호받고 있는 느낌을 갖게 하였다. "고마워, 내일 보자." 한마디 던지며 자전거에서 내릴 때 뒤돌아보며 씩 웃어주는 친구의 웃음이 그렇게 위로가 될 수 없었다. 


지금은 그의 얼굴도, 이름도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힘들었을 때 아무런 말없이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위로를 받았다는 신기한 경험은 지금까지 잊히지 않는다.


나이가 지긋하신 거래업체 대표님과 커피를 앞에 두고 마주 앉았다. "내가 인생을 살아보니 말이야, 친구가 무척 중요해. 노년에 마음에 맞는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지..." 지금까지의 인생에 아무런 손익계산 없이 마음을 열어놓을 수 있는, 옆에만 있어도 위로가 되는 친구를 손꼽아 보면 그리 많지 않다. 그나마 함께하는 친구도 아버지 연세쯤 되 하나 둘 세상을 떠나 홀로 외로이 세월을 보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날은 비가 많이도 내렸다.


저녁을 같이하기로 한 친한 직장동료들과 시장통에 있는 꽤 유명한 막걸집에 앉았다. 힘들었던 일, 즐거웠던 일, 인생에서 부족했던 점, 앞으로의 삶의 계획들을 서없이 자유롭게 나눈다. 서로가 귀 기울여 들어주고, 마음 열어 동감해 주고, 입 열어 위로해 준다. 빗소리에 시간은 흐르고 가끔씩 와르르 웃는 웃음소리에 근심과 외로움이 저 멀리 날아간다. 


친구란 관계는 만들고 싶다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느 날 홀연히 나타나 너른 등을 내어주며 신뢰를 쌓고, 어느 날 빗소리에 이끌려 옹기종기 모여 앉아 귀와 가슴을 내밀어 경청과 동감을 쌓고, 입을 무겁게 움직여 위로를 쌓아 그렇게 조금씩 형성되어 가는 것일 게다. 그래서 지금 나이 들어서도 완성형에 다가가기 위해 조금씩 진정을 다해 친구 관계를 쌓아가고 있는 것이다.


친구여! 우리 서로가 필요할 때는 조용히 어깨를 내어주고, 말없이 등을 보여주며, 곁에 서서 같은 방향을 바라보자. 힘든 세상 같이 살아내자고 부드럽게 어깨 토닥여 주자.


출처: 네이버(응답하라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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