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벅뚜벅"
누군가 뒤따라 오는 것 같아 연신 뒤를 돌아본다. 내 발자국 소리에 소름이 돋는 깜깜한 저녁, 가로등도 없는 좁은 동네 골목길을 걸어간다.
어렸을 적, 집안의 장남이었던 나는 어머니가 몸이 아픈 날 저녁이면 가끔 동네 약국에서 약을 지어오는 심부름을 했다. 아마도 초등학교 고학년의 나이였을 듯싶다. 집에서 약국까지 가는 길에는 가로등 하나 없는 좁고 기다란 골목길이 있었고, 그 골목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 내려와야 큰 도롯가에 위치한 희미한 간판 불빛의 약국이 보였다. 약국을 오가는 길이 소름 끼치도록 무서웠으나 장남이자 남자인 내가 무섭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주로 외둥이가 많고 부모에 대한 '효'를 부르짖지 않는 현시대에는 '장남'이란 단어의 의미나 중요성이 퇴색했지만, 예전에는 그 무게감이 대단했다.
아이를 키워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훗날 다 느끼는 바이겠지만, 우리 집도 큰 아이를 키울 때는 첫아이인지라 육아 경험이 없어 올바른 사람으로 자라나기를 바라며 최대한 엄격하게, 그렇지만 아이에게 좋다는 음식, 옷, 교육에는 최대한의 투자를 감행했다. 둘째 아이부터는 큰 아이로부터의 경험으로 부모의 욕심을 덜어내어 아이가 원하는 바를 최대한 수용하는 육아를 수행한다. 그러하니 장남이었던 또래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동생들보다 엄한 환경에서 자라났고 그로 인해 규율 준수에 뛰어난 모범생들임을 알 수 있었다. 옛 어른들은 거기에 덧붙여 장남은 집안을 이끌어 나가야 하고 부모님에게 효도를 다하여야 한다는 의무감을 계속 주입하였다.
장성하여 직장을 가지고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키우면서도, 내내 집안의 대소사를 장남으로서의 책임감을 가지고 치러내야 했다. 부모님이 나이 들어서는 경제적 능력이 저하되고 자주 아프게 되니 생활비, 병원비 등에 신경을 써야 했다. 우리 나라의 이러한 습성은 미풍양속으로서 지금껏 이어져 내려왔다. 학교를 다닐 때 가장 많이 들었던 단어가 '충, 효'였고 '효자, 효녀'가 되지 못하면 패륜아로 취급될 정도였다.
"휴..."
지난 30년간 열심히 직장생활을 해왔다고 자부하나 퇴직을 앞두고 한숨이 새어 나온다. 퇴직을 하고 수입이 줄게 되면 가장 걱정되는 것이 연로한 부모님을 돕는 일이다. 아이들이야 장성해서 제 밥벌이는 스스로 할 것이고, 우리 부부야 가끔 용돈벌이하며 절약하고 살면 될 듯한데, 부모님을 도울 여유가 없어지는 것이 걱정인 것이다. 아직도 장남으로서의 무게를 내려놓기가 힘든 나를 보며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감정을 느낀다.
그간 그렇게 활개 치던 '충효사상'은 지금의 세대에는 낡고 고루한 사상이 되었다. 나는 부모님께 효도하기 위해 정신적, 물질적인 노력을 쏟아내었음에도 우리 아이들에게 바랠 수 없음이 약간 분하기는 하지만, 새로운 세상에 멋지게 적응하기 위하여, 아이들에게 나 같은 마음의 짐을 지우지 않기 위하여 노력하려 한다.
"여보, 아이들은 험난한 세상 파고를 하루하루 헤쳐나가기도 힘들 텐데, 자신들의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우리가 노력하자." 요즘 아내에게 자주 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