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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기영 Nov 29. 2023

21. 소양강처녀를 보다

일상에서 떠올린 단상

춘천을 다.


청량리역에서 경춘선을 올라탔다. 밖은 차갑지만 전철 안은 따스하다. 드문드문 앉은 사람들이 저마다 생각에 잠겨있다. 들고 간 쇼펜하우어의 책자를 펼친다. 그가 가진 행복론을 조목조목 주장한다. 눈이 침침하여 가끔 고개들 들면, 아무 일 없다는 듯 소리 없는 풍경이 펼쳐진다. 시간은 조용히 흐르고 햇빛은 따사롭다. 쇼펜하우어의 기준과 일치하지 않아도, 가만히 앉아있는 지금이 행복하다.


춘천역에 도착하자 초청자가 반갑게 손을 흔든다. 서울에 살다 얼마 전 춘천으로 이사 간 후배는 홀로 됨의 외로움을 전화너머로 가끔 호소하곤 했다. 지하철 출입구 너머에서 손을 흔들던 후배가 이제는 새로운 주거지의 당당한 주민처럼 의기양양하게 소리친다. "춘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추운데 오느라 고생했다며 차가운 내 손에 따듯한 쌍화탕을 쥐어준다.


근처의 막국수 맛집에서 점심을 먹고, 소양강으로 향했다. 차에서 내리자 차가운 바람이 제법 매섭게 불어오고 저민 옷깃마저 흔들어 댄다. 저 멀리 넓게 펼쳐진 강이 웅장하다. 겨울철이라 그런지 크게 출렁이는 물결에 계류장에 묶여있는 관광용 쾌속정이 연신 흔들린다. 


조금 걸으니 '소양강 처녀' 동상이 보인다. 제대로 된 처녀상이 있는 곳이 아닌 외진 곳에 조그맣게 서있는 또 다른 동상인지라 조금은 더 외로워 보인다. 황혼이 지는 소양강가에서 사랑하는 임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소녀. 지금의 쿨한 남녀관계와는 어울리지 않지만, 그 감정 그대로 감동이 있다.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니 주변의 작은 산 중앙에 큰 소나무 한그루가 바람에 흔들리며 꿋꿋이 서있는 모습이 눈에 박힌다. 저 정도의 크기로 자라나기까지 그 수많은 시간을 얼마나 흔들렸을지. 그래도 의연하다. '나도 저 소나무처럼 의연하게 늙고 싶다'라고 생각하는데 갑자기 눈물이 차오른다. "바람이 차갑다"며 얼굴을 두 손으로 비벼대서 후배가 눈치채지 못하게 했다. 마음이 동할 때 훌쩍 움직여 떠나고, 이리도 아름다운 광경을 목격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까.라는 생각에 무언가 뜨거운 것이 목젖을 치는 느낌이 들어 눈물샘이 자극되었나 보다.


차가운 바람에 얼어붙은 얼굴을 녹이려 카페에 들어가 커피 한잔에 제법 오랜 시간 수다를 털어냈다. 저녁을 먹고 가라는 후배의 붙잡음을 뒤로하고 다음을 기약하며, 서울로 향하는 지하철에 올랐다. 몰려오는 피곤에 잠시 눈을 감는다.


바람에 치맛자락 휘날리며 저 멀리 그리운 시선을 두고 말없이 서있는 '소양강 처녀'가 서로 다른 사연을 가지고 오고 가는 사람들에게 말을 건다. 세차게 부는 바람이 가져오는 외로움, 그리움이 사람의 '홀로 됨'을 새삼 일깨우지만, 그래도 옆의 소나무처럼 의연하게 살아가자고. 외로워지고 누군가 그리워지면 언제든 나를 찾아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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