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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기영 Dec 04. 2023

22. 등산과 인생살이

추억에서 건진 단상

평소 등산을 좋아하지 않았다.


산을 조금만 올라도 저질 체력으로 인해 땀이 비 오듯 흐르고 숨이 턱끝까지 차올랐다. '곧 내려올 산을 왜 이렇게 힘들게 오를까?'가 나의 오래된 의문이었다.


조용히 앉아 책을 읽거나, 어두컴컴한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거나, 안정된 분위기의 커피숍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거나, 전구빛의 소박한 포장마차에서 둥그런 테이블에 둘러앉아 인생이야기를 술안주 삼는 것을 나는 좋아한다.


대학생 시절. 친한 구들이 지리산을 다녀오자고 제안을 하였고, 왠지 낭만적일 것 같아 바로 동의하였다. 동네 뒷산이 아닌 제대로 된 산을 오르는 것은 처음인지라, 청바지와 운동화 차림에 무거운 배낭을 메고 설레는 마음으로 등산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겨우 첫 목적지인 노고단에 올랐을 뿐인데, 배낭을 벗지 못하고 그대로 큰 바위에 드러눕고 말았다. 그 뒤로 며칠에 걸쳐 어찌어찌 지리산 종주를 마치긴 하였으나 인생 최대의 육체적 고통을 맛보았던 것 같다.


직장 초년생 시절. 가끔씩 단합행사 개최되었는데, 주로 주말에 모여 등산을 하고 회식을 하였다. 내가 등산을 싫어한다고 빠질 수 없었으므로, 청바지에 운동화 차림으로 땀을 뻘뻘 흘리며 산을 오르내렸다. 어느 단합행사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등산을 마치고 힘이 들어 터벅터벅 걷다가 홀로 다짐을 하였다. '내가 단합행사를 결정할 수 있는 자리에 있게 되면 절대 등산은 하지 않겠노라고'


그로부터 세월이 흘러 IMF 사태로 온 나라가 떠들썩하고, 수많은 퇴직자가 발생했던 시절. 가정에 퇴직당한 사실을 차마 알리지 못하고, 출근하는 것처럼 집을 나와 등산을 하는 사람이 많았다 한다. 그들은 혼자서 외롭게 산을 타며, 상념에 잠기기도 하고 산이 주는 위로를 받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 뒤론 힘들 때 산이 주었던 위로로 등산이 좋아졌을 수도 있고, 그 시절의 고통스러운 추억으로 등산이 싫어졌을 수도 있으리라.


내 주변에도 등산을 좋아하고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등산의 장점을 수없이 열거하며 등산이라면 치를 떠는 나에게 등산을 권유하곤 하지만, 아직도 산을 오르내리고 싶은 생각이 들진 않는다. 그렇다 하더라도, 등산을 생각하면 인생살이가 떠오른다. 태어나서 은퇴할 때까지는 힘이 들어 헉헉대더라도 정상을 향하여 끊임없이 올라가야 하는 등산과 같고, 은퇴 후 생을 다할 때까지는 산을 조심히 내려와야 하는 하산과 같을 수 있다.


인생살이에는 내가 가졌던, 곧 내려올 산을 왜 오를까 하는 의문은 적용되지 않는다.  늙는다고, 곧 생을 마감할 것이라고 젊은 시절을 포기하고 살아내지 않을 순 없기 때문이다. 숨이 턱에 차고 이 쏟아져 내리더라도 정상을 향하여 올라가야 한다. 정상에서 멋지게 포즈를 취하며 산 밑 풍경을 내려다볼 수도 있고, 채 정상에 오르지 못하고 돌아 내려와야 할 수도 있지만 어쨌든 올라야 한다. 그런 연후에 조용히 산을 내려오면 된다. 하산할 때 포즈를 잡고 사진을 찍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그저 산행을 마치 산 밑의 평지에 발을 딛기 위해 천천히, 꾸준하게 내려오면 되는 것이다.


지금 인생의 등산을 열심히 하고 있거나, 등산을 마치고 하산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등산'이 아닌 '등·하산'을 위해, 우리의 온전한 '인생살이'를 위해 잔을 높이 드는 바이다.

출처: 네이버(카스파르 프리드리히, 구름바다 위의 여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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