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짧은 여행이 주는 포만감
추억에서 건진 단상
해가 밝기 전. 아내는 어제 저녁부터 이것저것 필요한 짐을 미리 챙겨 놓았고, 나는 아내의 철저한 준비성에 감탄하며 자동차 트렁크에 캐리어를 실었다. 엔진의 시동을 거니 어둑한 공기를 밝히며 헤드라이트가 켜진다. 아내와 함께하는 짧은 여행의 시작이다.
아내와 정기적으로 여행을 시작한 지는 딱 10년이 되었다. 햇수가 쌓이니 매년 여행을 갈 때마다 찍은 사진이 늘어나고, 한 번씩 사진을 다시 보며 아내와 추억을 나누는 것도 쏠쏠한 재미가 되었다. 물론 전문가처럼 고가의 사진장비를 갖추고 찍은 사진은 아니다. 처음에는 여행하는 내내 우리 곁을 지나는 사람들이 신경 쓰이기도 하고 사진 찍기를 좋아하지도 않아 손에 들고 있는 핸드폰으로 겨우 몇 장을 어렵사리 찍었으나, 이제는 경력이 쌓여서인지 훗날 추억의 재료로 삼으려 몇십 장을 찍어댄다.
여행지는 당연히 사람들이 붐비는 곳이지만, 사람들이 많은 곳을 좋아하지 않는 나의 취향에 맞추어 여름휴가 시즌을 피해 여행을 감행한다. 겨울에 바다를 찾아가고, 단풍철을 피해 산을 찾고, 이른 아침 거의 첫 손님으로 수목원을 찾아가는 식으로 여행을 즐긴다. 그러다 보니, 여름 바닷가의 작열하는 태양을, 가을의 차가운 공기에 빨갛게 산화하는 단풍을 제대로 느끼지는 못하지만, 고즈넉한 바다와 산을 실컷 맛보는 또 다른 포만감을 느낄 수 있어 좋다.
여행을 가는 곳마다 마치 그 마을 주민인양 느긋하게 음식을 먹고, 커피를 한잔 하며 창밖을 말없이 바라보다 보면 이 마을에 안착하여 살아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하룻밤을 여행지에서 머물고 아침 일찍 근처의 바닷가를 아내의 손을 잡고 거닐다, 반려견을 가슴에 품고 맨발로 백사장을 산책하는 반백의 중년남자를 발견했다. 잔잔한 햇살을 뒤로하고 고요히 걷고 있는 그를 바라보다 또다시 '이곳에 안착해 볼까?'라는 생각이 도진다.
실제로 그곳에 정착하려면 어느 동네가 좋을지, 그 동네의 집값은 얼마나 하는지 심각하게 고려해 본 적도 있다. 아내와 여행을 마치고 올라오는 길에 아내에게 "이렇게 편안하고 아름다운 곳이라면 우리의 노년을 보내도 좋지 않을까?"라는 의견을 조심히 건넸고 아내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흔쾌히 동의를 해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깊이 들어갈수록 삶의 여러 요인들(아이들 주거. 늘그막에 애용할 병원. 우리 부부가 좋아하는 문화시설 등등)이 발목을 잡는다. 아직은 자연이 주는 감동보다 그간 길들여진 편안함이 앞서는 것 같다.
사실 지금의 내가, 편안함에 길들여진, 용기 없고 마냥 망설이는, 실패를 두려워하는 중년임이 매우 마음 아프다. 하지만 어찌하랴. 이러한 나를 인정하고 나이가 들어가도 최대한 짧은 여행을 자주 하여, 그곳에 포함된 삶은 아니더라도 그곳과 잠시 함께한 포만감을 느끼는 삶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것이 현명할 듯하다.
깜깜한 저녁. 짧은 여행을 마치고 아파트 주차장에 도착한다. 자동차 시동을 끄니, 어둠을 밝히던 헤드라이트가 꺼지고 정적이 찾아온다. "수고했어. 이번 여행도 즐거웠네" 서로 토닥이며 현관문을 연다. 다시 일상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