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리리릿"
날카로운 신호음과 함께 지하철이 달려와 멈춰 선다. 지하세계로 통행하는 사람들이 몰려 나오고, 다시 몰려 탄다.
소음을 내며 달리는 지하철 차장 밖은 검고, 차창에 비친 내 얼굴은 유난히 창백해 보인다. 갑자기 밀려오는 피로에 눈을 깜박이다, 스르르 눈을 감는다.
맞은편에 앉은 초로의 부인들이 대화하는 목소리 톤이 제법 높아 나도 모르게 귀를 기울인다. 큰 의미 없는 주변의 이야기들이 반복된다. '웬 신변잡기를 저리도 장황히 늘어놓을까?'라고 생각하다, 얼마 전까지 인터넷을 통해 싸게 구매한 오리털점퍼를 처음 입고 외출하였는데 잘 어울릴까? 길게 길렀던 머리카락을 짧게 다듬었는데 이상해 보이진 않겠지?라는 생각에 잠겼던 나도 부인들과 별반 다를 것 없다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온다.
삶을 산다는 것이 늘 중요한 거대 담론만 생각하며 사는 것은 아닐 것이다. 순간순간 주변의 사소한 일을 생각하며, 걱정하며, 즐거워하며 사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안한다.
목적한 역이 다가와 자리에서 일어난다. 앞에 있던 젊은 여성이 누군가에게 자리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듯 재빨리 앉는다. 예전엔 이러한 생각과 행동이 싫어 자리가 생기더라도 앉지 않고 서있었는데, 요즘은 지하철을 타든, 버스를 타든 빈자리만 노려보고 급한 맘으로 낚아채곤 한다.
삶을 살아가면서 항상 고고한 행동만을 생각하고 실천하는 것은 어렵고 힘들다. 어느 순간 편안함과 소소한 이익을 위해 악다구니 쓰며 살아가는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하곤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주변의 양심 없는 행동과 자기 이익만을 위해 배려하지 못하는 행동을 욕하며 살다가, 똑같은 행태를 보이는 나의 모습을 보며 자조한다.
출구를 향해 한 무리의 사람들과 함께 걷는다. 가파른 경사를 천천히 오르는 에스컬레이터에 오른다. 마지막으로 빛이 비치는 지상을 향해 계단을 오른다. 출구를 향해 오르는 나의 옆을 바삐 걸으며 스쳐가는 남녀노소가 있다. 나는 각자의 목적을 가지고 지하에서 지상으로 향하는 인간들 속에서 살아가는 그저 그런 또 하나의 인간이다.
지상의 지하철 출입구에서 나를 기다리는 친우들과 환하게 웃으며 악수를 나눈다. 악수하는 우리의 주변엔 먹이를 찾아 뒤뚱거리며 걷는 비둘기들이 있다. 먹고 자고, 먹고 자는 인간들은 지구의 살만한 땅 위를 점령하고 먹이를 찾아, 안식을 찾아 중구난방 돌진하고 있다. 나도 움직이지 않으면 먹이를 놓칠까, 안식처를 잃을까 전전긍긍하며 무리 속에서 헤맨다.
나는 남들과 다른 고고한 자태를 소망하며 무리 속에서 뒤돌아서다, 앞을 향해 돌진하는 힘에 밀려 같은 방향으로 달리다, 다시 회심하여 뒤돌아 서기를 반복한다. 어느덧 쓸려 쓸려 멀리 와있다. 죽음에 다다르면, 나의 마지막 모습은 어떨까. 나의 마지막 말은 어떤 문장일까. 나의 마지막 행동은 무엇일까. 그래도 한 번씩은 고고함을 흉내 내어 봤다고, 그래도 좀 더 뒤돌아 걸었어야 했다고, 스스로 뇌까리며 조용히 손을 펴고 쓸쓸한 웃음 띄우며 눈을 감을까?
악수하며 꽉 쥔 친우의 손길이 따스하고, 심란한 내 마음을 토닥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