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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기영 Jul 18. 2024

43. 작은 신혼집의 기억

추억에서 건진 단상

밤이 되었는데도 여름의 습한 공기가 담쟁이덩굴처럼 온몸을 감싼다. 잠을 자려고 뒤척이지만, 몸의 움직임에 따라 이곳저곳 불쾌한 끈적임만이 느껴져 쉽사리 잠에 들지 못한다.


신혼의 그 작은 빌라에서의 여름도 비슷했다.


아내와 첫 신혼살림을 시작한 서교동의 작은 빌라는 방 하나, 조그마한 싱크대 하나가 겨우 자리 잡은 부엌, 그리고 길고 좁은 화장실 하나가 있었다.


집과 밖을 가르는 물건이라곤 새시에 불투명 유리창을 덧댄 작고 튼튼해 보이지 않는 현관문 하나가 전부였다. 내가 출근하고 나면 홀로 남는 아내 외부의 침입 없이 무사히 지낼 수 있을지 걱정이 되어 집을 나설 때마다 뒤돌아보곤 하였다.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유일한 안방 창문을 열면 2M 정도의 간격을 두고 바로 앞 빌라의 붉은 벽돌 벽면이 떡하니 버티고 있어 답답하였다.


그 해 여름은 무척 더웠다. 좁은 공간에 지어 꽉 막힌 작은 빌라에는 밤이 되자 열기가 가득 찼고, 잠 자려 필사적으로 는 아내와 나를 무자비하게 괴롭혔다. 결국은 잠에 들지 못하고, 좁고 긴 화장실 플라스틱 대야에 물을 받아 발을 담그고 한여름 밤의 열기를 식히며 한참을 투덜거렸다.


한여름 지독한 더위 덕분에, 최대한 빨리 이 작고 답답한 빌라를 벗어나 집다운 집을 마련하고자 고군분투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피해는 고스란히 아내가 뒤집어썼다. 집 구입자금을 빨리 마련하겠다고 그 흔했던 자동차 하나 구입하지 못해, 나의 아내는 아이를 업고 짐을 양손에 바리바리 들고서 친정이며 시댁을 오갔다. 


둘째가 생기고 나서는 짐이 더 많아졌고, 명절에 고향을 다녀오는 길은 어른들이 손에 들려 보내는 짐까지 더해져, 지하철을 기다리며 아이들과 짐에 묻혀 서있 아내와 나의 지친 모습에 부아가 울컥 솟아올랐다. '집 마련도 좋지만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하나?'라는 회의감에 치를 떨었다.


그러고도 전셋집을 몇 번 더 옮긴 후, 우리의 집을 마련하였다.


얼마 전. 갑자기 아내가 신혼집을 가보고 싶다고 독백처럼 말했다. 


그날도 뜨거운 햇빛이 작열했고, 우리는 무언가에 홀린 듯 그 여름의 신혼집을 찾아갔다.


아내는 옛 기억을 더듬으며 "여기에는 조그마한 시장이 있었는데, 코너에는 금은방이 있었는데, 다음 사거리엔 한약방이 있었는데..."라며 쉼 없이 자신의 기억들을 펼쳐냈지만, 나는 사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단지 그 여름날의 더위와 플라스틱 대야의 차가운 물을 벗 삼아 투덜대던 나의 투덜거림만이, 한여름과 새내기 신랑의 사투만이 내 머릿속 가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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