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뒤면 나와 이종 사촌인 민준이 형준이가 필리핀으로 떠난다. 민준이가 없는 내 생활은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이제 혼자라니 벌써부터 마음이 허전하다. 민준이 고모가 필리핀 마닐라에서 홈스테이를 하시는데 좋은 기회에 시기적절하다고 내린 결정이시다. 너도 나도 영어 열풍으로 방학을 이용해 영어 캠프에 다녀오거나 단기 영어 연수를 다녀오는 친구들을 보긴 했어도 민준이 형준이가 가게 될 줄은 몰랐다. 돌봄 교사를 하시는 이모가 바쁜 탓도 있었지만 이제 5학년이 되는 민준이와 3학년이 되는 형준이가 필리핀에 다녀와서 중학교 과정에 지장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갑자기 결정된 일이다.
지난 번 엄마한테 이모가 하시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언니, 남들은 방학마다 대학 영어 캠프 보내느라 안달인데 나만 너무 느슨했나 싶어서 더 늦기 전에 결정한 거야. 고모네 집이니 얼마나 좋은 기회야. 그런데도 한 번도 생각을 안했으니...지욱이도 같이 보내면 안 될까? 한 번 생각해봐. 좋은 기회잖아. 애들도 같이 있으면 덜 외로울 테고 안심도 될 텐데...”
엄마는 단칼에 거절하셨다
“우리 형편 알면서 무슨 어학연수를 보내? 아무리 필리핀이라 교육비 싸다고 해도 지금 영어학원도 겨우 보내는데. 못 보내!”
“그러지 말고 형부랑 다시 한 번 상의해 봐.”
처음에는 방학 두 달간이라고 해서 좋은 기회다 싶었는데 갑자기 2년으로 결정됐다니 너무 긴 시간이다. 물론 이건 민준이만 아는 사실이고 동생 형준이는 지금도 방학동안만 가는 줄 알고 있다. 이제 중학생 되서나 만나게 된다. 민준이의 뜻과는 상관없이 왜 우리 의견은 묻지도 않으면서 무조건 따르라고만 하는 건지 화가 나고 답답하다.
어제 만났을 때도 민준이의 마음이 심란한지
“나도 가기 싫어. 이제까지 잘 지내다가 갑자기 말도 안 통하는 나라에서 어떻게 학교를 다니냐? 에휴...”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늘 밝은 민준이의 낯빛이 그 날은 몹시 어두웠다.
“그래도 고모니까 안심이잖아. 사촌들도 있고, 괜찮을 거야.”
평소라면 늘 민준이가 나를 위로했는데 오늘은 내가 민준이를 위로하고 격려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너도 같이 보내달라고 해 봐. 너라도 같이 있으면 잘 견딜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도 얘기하고 이모도 지난 번 얘기했는데 어림도 없어. 우린 보낼 형편이 안 된대. 아빠가 사업 실패만 안했어도 우리가 할머니네 집에서 살 일도 없고 같이 보내주셨을 텐데...”
“그러게. 다시 한 번 이모를 설득해봐.”
“알았어. 형준이는 어때?‘
“걔가 뭘 알아. 이제 3학년 되는데 아무 생각 없지. 그냥 놀러가는 줄 알아. 형준이 때문에 더 걱정이야. 맨날 엄마 아빠 찾고 적응 못할까봐.”
이렇게 걱정하는 민준이 얼굴은 처음 본다. 늘 자신감 넘치는 해피 바이러스 같은 아이였는데 말이다. 마음이 복잡하고 심란해 보였다.
“왜 안 그렇겠어! 만약 나 혼자 가라면 난 아마 못 간다고 울고불고 떼썼을 거다”
민준이 고모는 필리핀에 가신지 20년이 넘어서 현지인처럼 필리핀 자국어인 따갈로어도 잘 하시고 영어도 잘 하신단다. 고모부는 사업을 하시러 갔다가 초기에는 같은 한국 사람에게 사기도 당하시고 진짜 어렵게 고생 하시다가 힘들게 자리를 잡으셨다고 했다. 조기 유학 열풍이 불면서 고모가 지인들 아이들을 시작으로 한국 학생들 홈스테이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시면서 이제 안정 되시고 반응이 좋아 소개 소개로 지금은 학생들이 많아진 것이다. 나도 민준이랑 같이 가서 영어 공부도 하고 새로운 경험도 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내가 결정할 일도 아니고 유학비를 대줄 형편도 안 된다니 방법이 없다. 도대체 영어가 뭔지 영어 유치원 출신 친구들은 더 자부심도 강하고 내가 들어도 발음이 원어민 같아 옆에 있으면 괜히 기가 죽는다. 난 겨우 영어 단어 외우기도 버거운데 영어를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다니 화가 치민다. 쉽고 창의적이고 과학적인 우리 한글이 있으면 뭐하나. 다들 영어 못하면 도태 된다고 말하는데. 요즘은 한국어 배우는 외국인도 많고 제2 외국어도 한국어가 대세라는데 우린 여전히 영어 열풍이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영어 학원은 기본이고 전화 영어로 프리토킹 수업하는 친구들도 있다. 무엇보다 엄마는 내 교육에 관심도 없으시다.
이번 기회에 집을 떠나 엄마와 좀 떨어져 있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은데... 엄마 생각을 하니 갑자기 마음이 답답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