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준이와 나는 이종사촌 지간이면서 친구이다. 엄마가 결혼을 먼저 했지만 첫 아이를 유산하고 어렵게 나를 가지셨고 이모는 결혼 후 바로 민준이가 태어나 우린 동갑이고 사촌이자 올해는 같은 반까지 됐다. 민준이 덕분에 학교생활이 즐겁고 그야말로 훨훨 날아다녔다. 어릴 때부터 이모가 일을 한 탓에 인천 살던 엄마를 이모가 사는 일산으로 이사 오라고 해서 민준이를 맡기고 나가셔서 둘은 어릴 때부터 거의 같이 자랐다.
자매지간인 이모와 엄마가 다르듯 우리 성격도 확연히 달랐다. 민준이는 차분하고 무엇이든 한 번 빠지면 집중력이 좋아 레고 맞추기와 자동차 조립과 같은 놀이를 좋아했고 나는 까불거리고 차분하지 못하며 활동적이라 몸을 쓰는 운동이나 놀이를 좋아했다. 민준이는 머리도 좋은데다 공부도 잘 하고 잘 생기기까지 해서 학교에서 늘 인기도 많은 인싸였고 나는 공부도 키도 생김새도 특별한 재능도 없이 그저 그런 아주 평범한 아이였다. 한 마디로 아싸였다. 민준이 덕분에 아싸였던 나는 아이들과 점심시간이면 축구에 주말이면 생일 파티 초대에 분기별로 중요한 모둠 과제 발표에 늘 바쁜 아이가 됐다. 학기 초부터 민준이가 옆에 없었다면 난 아싸에 속해 우르르 몰려다니는 인싸 친구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을 거다. 작년 학교생활처럼 최악이었을 테지만 지금은 다르다. 존재감 없는 평범한 그저 그런 나였는데 그야말로 핵인싸인 민준이 덕분에 나도 인싸가 됐기 때문이다. 이런 기준을 만든 사람들은 특별히 없지만 학교에만 가면 자연스럽게 그룹이 나눠진다. 못마땅하지만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민준이와 내가 사촌지간인 것을 아는 친구들이 점점 늘면서 나도 주목받기 시작했다.
“너희 사촌이라서 재밌겠다. 자주 만나? 같이 잠도 자겠네!”
“그럼 맨날 만나고 자주 같이 자. 숙제도 같이 하고 영어 학원도 같이 다니고.”
“그래? 어디 학원 다니는지 알려줘!”
“알았어!”
괜히 어깨가 으쓱해졌다. 민준이는 줄곧 회장을 도맡아 했다. 회장 선거에 나가기만 하면 선출 된다. 내가 회장 선거에 나가도 되냐고 물어보면 엄마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로
“나가지 마! 엄마 바쁘니까 학교 못 쫓아다녀. 그리고 네가 무슨 회장에 나간다고... 되기나 하겠어!”
아주 가슴에 콕콕 못을 박는 말만 한다. 늘 이런 식이다. 내가 뭘 원하는지 내가 뭘 잘 하는지 관심이 있기나 한 건지 화만 나고 실망만 남는다. 이모는 바쁘면서도 늘 민준이 일이라면 앞장서서 환경미화. 체육대회, 현장학습, 학예회 등 바쁜 시간을 내서 학교 일을 돕는데 엄마는 상담 기간 아니면 학교에 절대 안 오신다. 심지어 공개 수업 때도 오시지 않았을 때는 나에게 관심은 있는 건지 실망이 컸다.
엄마는 가까운 농수산물 마트에서 경리일을 보신다. 아빠가 사업 실패한 뒤로 민준이와 같은 아파트에 살았는데 그 아파트를 팔고 빚을 갚으신 뒤에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 들어와 같이 살게 되었다. 우리 식구끼리 단출하게 살다가 여섯 식구가 북적거리니 처음엔 정신없고 불편했지만 음식 솜씨 좋으신 할머니 덕분에 좋은 점도 있었다. 우리 가족끼리 살 때보다 내가 덜 혼난다는 사실도 좋아진 점 중 하나이다. 할아버지께서 그나마 내편이셨기 때문에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주셨다. 가끔씩 우리를 기차를 태워 여기저기 데리고 가 주시고 어릴 때 비싼 장난감을 사주신 분도 할아버지였다. 멋쟁이 할아버지에 센스가 넘치신다. 엄마도 신경 안 쓰고 일을 다닐 수 있어 좋으시고 일정 수입이 없으시던 두 분도 생활비를 내놓으시는 부모님 덕분에 조금은 여유가 생기셨다. 다만 아빠만 늘 죄인인 것처럼 주눅 들어 있었다. 약주를 좋아하시는 할아버지께서 가끔 술을 거하게 드시고 엄마가 고생 시킨다고 아빠에 대해 투덜거리시는 소리를 들은 뒤부터 아빠는 식사만 하시고 들어가면 방에서 거의 나오시지 않으셨다. 사업하실 때는 잘 나가는 사장님 소리를 들으시고 외제차와 가전제품 바뀌시는 취미로 사신 분이였는데 환경은 사람을 참 많이 변하게 한다. 나와 동생 지인이는 방이 없어 할머니 방과 거실을 왔다 갔다 하면서 잠을 자고 겨우 책상과 컴퓨터만 놓은 작은 공부방 하나가 나의 유일한 공간이다. 일을 나가시는 엄마 때문에 대식구 살림을 도맡아 하시는 할머니께서 가끔씩 투덜거리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내가 이 나이에 무슨 고생이냐구! 딸 사위에 애들 뒤치다꺼리나 하고 내 신세도 참 딱하다. 딱해! 나두 이제 삼시 세끼 준비하는 거 진짜 지겹다구!””
하시는데 듣기 좋은 말은 아니었다. 우리 식구 들으라고 하시는 말씀 같았다. 아빠가 원해서 그런 것도 아닌데 인쇄업을 하시면서 박스를 만들다가 한 번은 전기합선으로 공장이 불이 크게 나서 공장이 다 타버리고 납품할 박스도 다 타버려 손실이 컸다, 다행히 화재 보험을 들어놓아 받은 보험으로 기계만 다시 사들여 겨우 복구해서 일을 시작하셨지만 또 다시 부도를 맞으면서 사업을 완전히 접을 수밖에 없었다. 빚도 많이 져서 엄마 아빠가 그 문제로 한두 번 다투신 게 아니었다. 엄마가 우시는 모습도 그 때 처음 본 것 같았다. 그 때부터 엄마가 일하러 나가신 뒤로 집안 살림과 우리들 교육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다행히 아빠는 지금 나라에서 교육비를 대주면서 기술을 가르쳐주는 기관이 있어서 기술 교육을 배우시면서 취업 준비를 하고 계신다. 수료를 하고 자격증을 따야 재취업을 할 수 있어 아직 시간이 걸리겠지만 사업 실패 후 일자리가 없어 막막해하신 아빠가 안도하시는 게 보였다. 누구보다 일만 열심히 하신 성실한 분이시니 금방 배우시고 일하시게 될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나마 기술이니 잘 써먹겠네. 이젠 그만 일어나야지!”
할아버지께서 아빠가 교육을 시작하실 때 하신 말씀이다
“죄송합니다. 장인어른. 신경 쓰게 해드려서 면목이 없습니다.”
“자네가 일부러 그랬나? 상황이 안 좋았던 거지.”
그나마 아빠와의 관계가 조금은 좋아진 것 같아 다행이었다. 빚을 정리하고 남은 비용과 엄마 월급으로 생활하기고 있지만 넉넉하지는 않아서 민준이와 같이 1년만이라도 보내라고 필리핀 유학 얘기가 나왔을 때 엄마는 펄쩍 뛸 수밖에 없었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