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방학이 끝나고 2학기에 접어들어 수학경시 대회가 있었다. 몇 주 뒤에 결과가 나왔는데 민준이가 우리 반 최우수상을 받았다. 민준이는 최고의 날이었지만 그 날 나는 최악의 날이었다. 악몽의 시간 그 자체였다.
“민준이는 1등인데 너는 몇 점이라고? 기가 막혀서 50점이 점수냐고? 아휴, 못 살아. 내가 너에게 못해준 게 뭐가 있는데 넌 왜 그 모양이야! 공부는 안하고 매일 게임이나 하니 잘할 리가 있냐고? 도대체 넌 잘 하는 게 뭐야?"
폭풍 잔소리를 쏟아내시는데 엄마의 입을 막고 내 귀도 막아버리고 싶었다. 민준이는 민준이고 나는 난데 맨날 비교하고 상처 주는지 모르겠다. 나는 할 말이 없는지 아냐고 말하고 싶었다. 엄마도 이모랑 다르면서 왜 나한테만 잘 하기를 바라냐고 소리치고 싶었다. 친구들은 시험 결과도 잘만 숨기는데 나는 이모 때문에 속일 수가 없다. 민준이랑 사촌인 유일한 단점이다.
“나도 잘 하고 싶었는데 어려웠단 말이예요. 잘 하고 싶은데 안 되는 것도 있는데 어쩌라구요! 그럼 수학 학원을 보내주던지요!”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분명히 네가 수학학원 다니기 싫다고 했잖아.”
불난 집에 기름 붓는 것 같아 더 대들고 싶었지만 참고 방으로 들어갔다.
“엄마 말 안 끝났는데 어딜 가! 넌 도대체 누굴 닮은 거냐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뒤통수 뒤에 꽂혔다. 방문을 ‘쾅’ 닫고 책상에 앉았는데도 분이 안 풀렸다.
화가 난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볼펜으로 연습장에 마구마구 낙서를 하고 있었다. 내가 스트레스 받을 때 푸는 한 방법이다. 그 때 엄마가 뒤따라 들어와서는 공책을 확 낚아챘다.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아뿔싸! 어떡하지?’
“뭐야? 이게?”
하시며 매섭게 쏘아보았다.
‘ㅅㅂ ㅅㅂ ㅅㅂ’ 이라고 정신없이 써놓은 초성 글자를 보고는 처음에 기가 막힌다는 듯 어이없게 바라보시더니 하얗게 얼굴이 질리셨다. 그리고 아무 말도 안 하시더니 그냥 방을 나가버리셨다. 엄마의 안색이 그렇게 변한 건 처음 본다. 차라리 소리를 치고 귓불 당기고 등짝을 때렸으면 이렇게 불안하지는 않았을 텐데 가슴이 쿵쾅쿵쾅 거렸다.
‘어쩌지? 왜 하필 그 때 들어오신 거야! 내 마음이 순간 그랬다는 거였지. 엄마에게 한 말은 아닌데...학교에서 친구들이 하는 말을 들으면 난 아무 것도 아닌데.’
쉬는 시간만 되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 사이사이로 욕설이 난무한 교실이다. 비교적 바른 언어습관을 가지려고 노력한 나였는데, 화가 나서 의미 없이 쓴 낙서일 뿐인데, 엄마가 확대해석 할까봐 안절부절 못했다.
그 날 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없이 조용히 지나갔지만 며칠 동안 나랑 눈도 안 마주치시고 집안 공기는 무겁기만 했다. 엄마 눈치만 살피면서 벌써 며칠 째 좌불안석이었다. 엄마는 진짜로 화가 많이 나실 땐 잔소리도 안하고 오히려 말이 없어진다. 아빠와도 싸우시면 며칠 동안 말을 안 하셔서 그걸 알기에 더욱 불안하다. 아빠께선 아직 사실을 모르시는지 별 내색이 없으셨지만 아셨다면 불 같으신 성격에 그냥 넘어가지는 않으셨을 거다.
민준이에게 도움을 청했다. 고민도 없이 엄마에게 사과의 의미로 손 편지를 써보라고 했다. 문장력이 없어 걱정 했지만 자기가 도와준다고 했다. 없는 문장력을 가지고 겨우겨우 진심을 담아 쓴 장문의 편지를 민준이가 읽어보더니 조금 수정해 다시 써서 화장대 위에 올려놓았다. 그렇게 길게 편지 써본 건 처음이다. 어버이날도 엄마 생일에도 형식적으로 짧게 몇 마디만 썼을 뿐인데...조금은 마음의 짐을 덜은 것 같았다. 이제 용서든 벌이든 처분만 기다려야지...
학교 끝나고 바로 집으로 달려갔더니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시골에 가셔서 안계서인지 엄마가 일찍 퇴근하셨고 이모도 함께 계셨다. 민준이가 SOS를 친 모양이다.
“지욱아. 학교 잘 다녀왔니? 간식 먹고 학원 가야지. 이모가 도넛 사왔는데 방으로 갖다 줄게. 손 씻고 와서 먹어.”
방에서 도넛을 입에 넣어봤지만 엄마와 이모의 대화 소리에만 온 신경이 곤두섰다. 내가 들을까봐 조용조용 말씀하셨지만 또렷이 들었다.
“언니도 잘 한 거 없어. 시험 못 봤다고 화살부터 나가고 윽박지르면 누가 좋아해! 이번 시험 어려워서 평균도 낮던데 알고나 야단을 치던지. 안 그래도 주눅 들고 사기가 떨어진 애를 그렇게 잡는다고 될 문제가 아니지!”
“넌 네 일 아니라고 그렇게 쉽게 말하지 마!”
“지욱이도 잘못한 거 아니까 이제 그만 풀어. 난 지욱이가 가끔 안쓰럽더라. 형부는 눈길도 안주지, 언니는 버럭 화내고 소리만 치지 맘 붙일 곳이 없어 보여. 좀 잘 해 주면 안 돼? 화만 내지 말고 지욱이랑 얘기해 봐!. 아직 어린 애인데 얼마나 불안하고 답답하겠어?”
전적으로 내편인 이모가 눈물 나게 고마웠다. 내 마음을 정말 잘 대변해주고 있었다. 아마 민준이가 가보라고 했을 거다. 가서 도와주라고...잠시 후 현관 문소리가 나더니 이모가 가셨는데도 인기척 없이 한동안 잠잠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방문이 열리더니 엄마가 내방으로 들어오셨다. 무슨 말을 하실지 가슴이 콩닥거렸다.
“지욱아. 엄마가 그렇게 싫었니? 엄마 진짜 화 많이 났어. 설마 네가 엄마한테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거든. 내가 자식을 잘못 키웠나 싶어 엄마 잘못 같기도 하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더라.”
“엄마, 잘못 했어요. 화가 나서 순간적으로 쓴 말이고 사실은 저한테 쓴 말이에요. 전 머리도 나쁘고 잘 하는 것도 없는데 민준이처럼 시험 잘 봐서 엄마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는데 내 맘대로 안 되니까 화가 나서요.”
“너 낳았을 때 엄마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어. 너도 알잖아. 어렵게 너를 가져서 얼마나 정성껏 키웠는지...근데 자라면서 점점 자신감을 잃는 네 모습에 화가 나고 민준이랑 비교 되는 것도 싫고 주눅 들어 있는 네 모습은 더 싫었어. 요즘 우리 형편도 그렇고 엄마가 너한테 해준 것도 없어 괜히 자책만 들더라. 엄마 잘못이야. 네 편지 읽고 엄마도 반성 많이 했어. 미안해!”
“아니에요. 엄마. 전적으로 제 잘못이에요. 이제 정말 잘 할게요!”
“그래, 우리 잘 해 보자. 그리고 수학 학원에도 보내줄게. 다음에 또 이런 일 있으면 그 땐 진짜로 용서 안 해! 아빠한테는 비밀로 할 거야!”
하시면서 나를 안아주셨다. 오래간만에 느껴보는 따뜻함이다. 이번 일은 전적으로 내 잘못이었다. 아무리 화가 나도 해선 안 될 일이 있는 거다. 가벼운 마음으로 기분 좋게 학원을 마치고 오니 내가 좋아하는 삼겹살을 굽고 계셨다. 고소한 냄새가 집안에 진동하니 저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상추쌈도 싸주시고 김치에 밥도 볶아주셔서 푸짐한 저녁 식사를 끝내고 민준이에게 고맙다고 전화를 했다. 마음이 편해지니 날아갈 것 같았다.
내 마음을 가장 잘 알고 이해하는 좋은 친구 민준이. 민준이 덕분에 학교생활이 즐겁고 함께 만들어간 추억이 새록새록 했는데... 이번 일 같은 고민이 있을 때 언제든 내편이 되어준 든든한 친구였는데... 이제 곧 떠나고 내 옆에 없다. 그것도 2년이란 시간. 오랫동안 말이다. 다시 시무룩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