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학기가 시작 되었다. 6월에 학기가 시작 되며 4월에 마치고 두 달간 방학이다. 방학을 맞아 한국에 다니러 갔던 형들과 누나들도 한둘씩 돌아오고 이제 고모집도 다시 시끌벅적해졌다. 학용품 준비를 하고 초등학교도 교복을 입어 우리는 교복도 미리 맞추고 나는 5학년 형준이는 3학년에 들어갔다. 학교는 빌리지에서 가깝지만 아이들 혼자 등하교 할 수 없는 규정이 있어 등교는 고모가 하교는 기사님이 해주셨다.
필리핀계 외에 중국계 필리핀 아이들이 대부분이었고 한국인은 나 혼자여서 그런 지 입학 첫 날부터 동물원 원숭이마냥 쳐다보는데 창피하고 기분이 나빴다. 공용어는 영어이지만 아이들은 무슨 말인지도 알 수 없는 따갈로어를 더 많이 써서 한동안 나는 말없는 아이로 지낼 수밖에 없었다. 나도 그들이 신기한 건 마찬가지인데 말할 친구가 하나 없으니 답답했다. 사촌형이 필리핀에 처음 와서 유치원에 다닐 때 지금 우리보다 더 어린 4살 때였으니 말도 안통하고 답답한데다 놀림까지 받아 친구들이랑 매일 우격다짐으로 싸우고 주먹으로 때리고 했다는데 그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지금은 영어에 따갈로까지 현지인처럼 구사한다.
우리가 다닐 학교는 어학원이나 국제학교가 아닌 대학 부설 사립학교여서 영어가 공용어이지만 따갈로어 수업 시간이 따로 있다. 역사 수업도 있지만 필리핀 역사를 알리 만무하니 그 시간도 영어 수업이긴 해도 전혀 알아듣지 못해 지루하다.
필리핀 공립학교에서는 지역 언어로 수업을 한다고 들었다. 주로 따갈로어로 배우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비사야어로 배우고 같은 나라여도 서로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영어를 못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안내문, 간판 등이 다 영어라서 자연스럽게 배울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참 복잡하다. 우리처럼 공용어 한글 하나면 끝인데 최고의 언어로 인정받은 한글이 자랑스럽고 세종대왕님께 감사하다. 요즘 한류 열풍과 k-pop 인기로 한글을 배우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고 하니 자랑스러운 한글이 아닐 수 없다. 제2 외국어로 가장 인기가 높은 언어가 된 한글을 배워 현지에 있는 삼성 기업에 취업하려는 외국인이 많다고 한다.
유학생 프로그램이 따로 있는 어학원이나 미국식, 유럽식 과정을 배우는 국제 학교였다면 영어로만 수업하니 더 수월했을 것 같다. 영어도 금방 향상 됐을지 모르지만 현지 학교에선 친구들과 직접 부딪히면서 배우는 것들이 분명히 있으니 장단점이 다 있다. 필리핀식 영어는 특유의 딱딱한 발음이 있어 ‘필리핀 잉글리시’라고 부른다. 일종의 영어 방언이라고 생각하면 된다고 사촌 누나가 말해준 적이 있었다. 사촌 누나들을 비롯한 고모 식구들은 영어도 기본적인 따갈로어도 유창하게 구사해서 현지인들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이다.
나는 영어 수업 이외엔 잘 알아듣지도 못하겠고 수학은 못 알아들어도 풀어내면 되니 수학시간만 기다려졌다. 체육 시간도 좋았지만 날씨가 너무 더워 조금만 뛰어도 땀이 줄줄 난다. 학교가 넓어 야외 수업을 하면서 자연을 관찰하고 식물도 직접 키우면서 일지를 쓰는 가드닝 수업 시간이 있었는데 연못 주변에는 수생 식물이 제법 많았다. 선생님이 나에게는 따로 편의를 봐주셔서 수업 시간을 못 따라가는 대신 다른 과제를 내주셔서 성적을 받았다.
학교에서 두 번 정도 운 기억이 있다. 한 번은 내 샤프를 누가 가져가서 돌려달라고 했더니 자기 거라고 우기는데 말도 안 통하고 내 거라고 설명도 못하고 뺏어올 수도 없고 너무 억울해서 울었다. 한 번은 동양인이라 힐끔 힐끔거리고 괜히 툭툭 치는 애가 있어 참다 참다 폭발해서 소리를 지르고 한참을 울었던 적도 있다. 지금은 조금 친해져서 밥도 같이 먹는 친구가 생겼다. 점점 적응 능력이 생기고 살아남는 방법을 터득하게 됐다.
방과 후 프로그램으로 체스부에 들어가 체스를 배우게 되었다. 파트너를 바꿔가면서 1시간 정도 체스를 두는데 흥미도 생기고 나중엔 제법 잘해 체스 시합에서 자주 이겼다. 체스가 있는 날은 동생 형준이도 체스부에 들어 둘이 만나 일주일에 한 번씩은 같이 하교하니 좋다. 기사님이 가끔 늦으셔서 주차장에서 놀면서 1시간 기다린 날도 있었다. 땀을 엄청 흘리고 집에 왔더니 고모께서 사실을 알고 기사님께 주의를 당부하셨다.
자동차는 낮에는 고모나 고모부가 쓰셔서 하교 때는 트라이시클을 타고 오신다. 트라이시클은 오토바이 옆에 좌석을 달아 4.5인이 함께 탑승하는 또 다른 교통수단이다. 개인으로 소유한 사람도 많아 동반해서 타면 7페소 단독은 20페소로 지프니보다 비싸다. 개인적으로 자동차보다 트라이시클이나 지프니가 더 재미있어서 집에 돌아갈 땐 늘 신난다. 시간이 지나면서 학교도 빠르게 적응해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부모님이 오실 날이 가까워왔다.
며칠 전에 형준이가 아파서 조퇴를 한 적이 있다. 머리가 아프고 열이 조금 났다. 뎅기열이 유행한다고 들어서 혹시 뎅기열이 아닌지 걱정 했다. 뎅기열은 숲 모기에 물려 감염되어 고열, 두통, 오한, 근육통 증상이 나는 무서운 질환이다. 다행히 열이 아주 심한 건 아니라 고모께서 해열제 먹이고 얼음 수건을 올려주고 한숨 재웠더니 열이 내렸다. 이제 다음 주면 부모님이 오시는데 아픈 모습을 봤다면 속상해하셨을 거다.
특별한 이변으로 학교에 안 가는 날이 있다. 비가 많이 와서 시내가 잠긴 날이다. 비가 조금 많이 온다 싶으면 우린 주방으로 먼저 뛰어간다. 고모가 도시락을 싸시나 안 싸시나 확인하면 휴교인지 아닌지 바로 알 수 있다. 학교에서 미리 연락이 와서 우린 도시락을 먼저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다. 지난 번 내린 비는 태풍이 시작 되면서 비바람이 장난 아니었다. 밤새 천둥번개가 요란하더니 바람소리가 너무 요란해서 창문이 깨지는 건 아닐까 무서워 잠을 못 이루었다.
한국에서도 몇년전 처음으로 요란한 바람을 동반한 태풍이 온다는 소식에 부모님이 창문 사이사이에 신문을 끼우고 테미프를 붙이기도 했는데 그 날 온 태풍과 비교도 안 되었다.
태풍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수자원도 되고 지구 온도를 유지하고 플랑크톤을 분해시켜 바다 생태계를 활성화 시킨다지만 일단 무서운 비와 강력한 바람 때문에 큰 재해로 이어질까 두려운 마음이 앞선다. 몇 년 전에도 하이옌 태풍으로 몇 천 명이 사망한 적도 있었다. 태풍이 생성되는 나라여서 그런지 한 번씩 날씨가 요동을 치는 걸 보면 무섭고 우리나라처럼 좋은 기후를 가진 나라는 없는 것 같았다. 사계절 기후 얼마나 아름답고 좋은가. 여름만 계속된 나라에 오니 펑펑 내리는 눈과 겨울 추위가 벌써부터 그립다. 한국에서 첫겨울을 맞으면 분명히 화들짝 놀랄 거면서 말이다.
답답한 학교생활은 시간이 해결해주겠지. 마음을 다시 다잡아본다. 다음 주에 오실 부모님과 지욱이 생각을 하니 힘이 난다.
'조금만 참자. 참자. 시간은 금방 간다.'
힘들 때면 혼자 되뇌이는 주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