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우린 보드기 친구

by oj


돌아와서도 필리핀 소식만 들려도 귀가 솔깃해졌다. 엄마가

“민준아. 필리핀서는 숙제를 금지하는 법안이 발의 됐대. 마음껏 뛰어 놀게 하려고 교과서를 집으로 가져가지 못하게 하고 법을 만들었다네. 주말에는 숙제를 금지하는 법안을 어기면 5만 페소 벌금을 낸다니 애들은 무지 좋아하겠다. 그치?”

“내가 있을 때 만들어졌으면 좋았을 텐데요.”

그런데 실효성이 있을까 모르겠다. 미국도 숙제 없는 학교가 늘고 있다는데 아이들은 엄청 좋아하겠지만 만약 우리나라에도 도입되면 교육열 높은 학부모님들의 반대가 만만치 않을 거다. 숙제가 없고 교과서를 두고 간다고 과연 부모님들이 공부를 안 시킬지는 미지수이다. 똑같은 목적의 법안을 만든다면 여기에선 학원을 두 개 이상 못 다니게 해서 아이들이 학업 스트레스 좀 줄어주면 좋겠다. 한국에서 진짜 적응하기 힘든 것이 학원에 학원 숙제이다.

또 하나는 안타까운 소식인데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다가 테러가 발생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어 계엄령이 내려졌다고 했다. 이건 아빠한테 들은 얘기인데 카톨릭 국가라서 이슬람 세력의 위협이 만만치 않다고 한다. 신부님도 피살 되었고 심각한 혼란을 빚고 있는 것 같아 걱정 된다. 다른 때 같았다면 필리핀이란 나라의 어떤 소식도 나랑 상관없는 일이었는데 2년 살았다고 귀가 솔깃해지고 진심으로 걱정 되고 우리나라처럼 안정되고 발전된 나라가 되기를 바랐다. 고모와 사촌들이 아직 살고 있고 잠깐이지만 정이 들었던 나라였기 때문이다.

중학교 생활은 물 만난 고기처럼 뭐든 신나게 잘 하고 있었다. 일단 지욱이랑 같은 반이 되었고 여전히 우린 ‘인싸’였으며 담임선생님께서도 체육 과목이라 얼마나 재미있으신지 모른다. 우리들의 눈높이에 맞춰주시면서 친근하고 서스름이 없으시다.

한 달 늦게 입학한 나에 대한 궁금증들이 많아 나는 ‘필리핀에서 온 걔’ 로 통했다. 친구들의 관심이 끊이지를 않았고 호기심의 대상이라 여학생들도 인기 있다는 것이 느껴졌지만 아직은 친구들과 어울리는 게 더 좋다. 슬슬 세희와 티격태격하는 지욱이를 보니 여친은 천천히 만나는 것이 좋겠다.

영어는 확실히 늘었다. 일단 듣기가 편해졌고 문법은 조금 공부해 보니 수월해졌다. 수학은 좀 더 분발해야 할 것 같다. 여기는 수학을 잘 하는 친구들이 너무 많다. 필리핀에선 내가 수학은 탑이었는데 여기선 아직 멀었다. 선행 학습을 하는 친구들이 많아 벌써 중3 과정 다 배우교 고등 수학 하는 친구들도 있다. 우린 너무 모든지 빨리빨리라 탈이다. 그래서 많은 걸 이루었는지도 모르지만 천천히 해도 될 일을 너무 급하게 앞서 나간다. 뒤쳐지지 않기 위해 기를 쓰는 친구들도 있는데 말이다.

지욱이는 절대 수포자는 되지 않겠다며 수학 학원을 열심히 다니면서도 영어뿐 아니라 수학성적도 좋아졌다. 노력이 가상하다. 내가 키운 것도 아니면서 요즘 성장한 지욱이를 보면 괜히 흐뭇하고 뿌듯하다. 친구이자 사촌인 핏줄 관계는 어쩔 수 없나 보다. 영어에 열의가 생긴 지욱이를 보니 한 달간의 어학연수가 자신감과 동기부여를 주어 효과 만점이었던 것 같아 기쁘다.

그 동안 책도 못 읽고 2년 동안 남의 나라 언어를 배우면서 어려웠던 국어 시간이 지금은 제일 좋다. 이제 너무 쉬운 한글로 된 국어를 배우니 누워서 떡 먹기처럼 못할 이유가 전혀 없다.

엄마가 중학 필독 도서라며 추천해주시는 책을 요즘 틈틈이 읽고 있다. 최근에 읽은 일본 소설 '불균형' 은 왕따 당한 한 친구가 그 상처를 극복하면서 불안전한 아이들의 마음을 잘 말해주고 '수레바퀴 아래서' 는 신학교에서의 엄격한 규율과 규칙을 지켜야 하고 성적에 대한 압박감과 기대에 미치지 못한 중압감을 이기지 못 해 수레바퀴 아래 짓눌린 주인공의 심리를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읽을 책도 많고 할 일도 많고 동아리 활동도 해야 하고 여기에 오니 할 일이 너무 많지만 활기가 넘치니 힘들어도 만족한다.

순우리말 조사 숙제를 하다가 순우리말 낱말에 ‘보드기’라는 말을 보고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보드기’란 크게 자라지 못하고 마디가 많은 어린 나무란 뜻이란다. 처음 알게 된 순수 우리말이 신기했고 뜻을 보는 순간 꼭 나와 지욱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욱이와 내가 그동안 ‘보드기’ 였다면 이제 어린 나무에서 조금은 큰 나무가 되어 누군가의 그늘이 되어주고 싶다.

어릴 때 읽었던 ‘겨자씨의 꿈’ 이란 책에 나온 이야기처럼 너무 작아 늘 놀림만 받던 겨자씨가 여름이 지나 무성한 잎을 가진 큰 나무가 되어 새가 깃들고 비를 피해 앉아서 쉬게 하면서 쉼터가 되어주었다. 나도 지욱이도 한 때는 어린 나무로 옹이투성이였다면 지금은 그 때보다 조금은 큰 나무가 된 것 같다. 필리핀에서 생활은 나를 성장시켰고 가족과 지욱이가 늘 옆에 있었다.

‘보드기’ 였던 나와 지욱이가 서서히 큰 나무가 되기 위해 이제 한 발자국씩 더 힘차게 내딛어 볼 것이다. 뭐든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불쑥불쑥 생긴다.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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