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 수원 시내는 불에 타고 장독대만 덩그라니 남아있었다. 어머님하고 나는 장독대에서 닥치는 대로 고추장이건 간장이건 퍼서 나는 짊어지고 어머님은 이고 가서 부곡장에서 장을 팔아 보리쌀을 사서 그것으로 가족들이 연명하였다. 식량이 여의치 않으면 나는 뒷산에 올라가 지푸라기를 주워 가지고 오면 할아버님은 새끼를 꼬고 그 새끼줄을 이용하여 맷방석(매통이나 맷돌을 쓸 때 밑에 까는 짚으로 만든 방석으로 멍석보다 작고 동글하다)을 만드셨다. 몇 개씩 짊어지고 장에 가서 납작 보리쌀과 교환해 오시면 보리밥을 지어 고추장에 비벼 먹으면 그렇게 꿀맛일 수가 없었다.
어머님은 부곡역전에서 간장 장수를 하시고 나는 산에 가서 나무를 하여 생활하던 중 사촌 동생이 괴질에 걸려 시름시름 앓다가 난리 통에 생이별을 하였다. 식구들은 물론 작은 어머님께서는 더할 나위 없이 슬퍼하셨다. 사촌 동생이 사망하고 여동생까지 호열병에 걸려 사경을 헤맸다. 걱정이 많으시던 어머님은 수원에서 솜뭉치를 지고 온 게 있어서 죽던지 살던지 모른다고 하시면서 솜뭉치 속에 동생을 묻어놓고 내버려 두었다. 죽은 줄 알고 열어보니 어머님께서는 동생이 살았다며 기뻐하셨다. 여동생을 잃을 뻔 했는데 다행이었다. 그 때는 하도 이가 많아 솜바지를 벗어서 털면 이가 한 돼 가량 떨어지는 것 같았다.”
결국 목숨을 잃은 가족이 있었구나 싶어 얼굴도 못 본 할아버지의 사촌 동생이 너무 측은하게 느껴졌다. 호열병이 뭔지 몰라 찾아보니 콜레라를 지칭하는 말이다. 호랑이가 살을 뜯어먹는 것 같이 아프다고 붙여진 중국식 이름이다. 원인을 몰라 괴질이라고 불렀는데 오염된 음식이나 물을 통해 감염 된다고 한다. 그 와중에 할아버지가 아프시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이었나 싶었다. 자식을 잃은 엄마의 마음이 어땠을지 헤아려졌다.
우리 엄마도 내가 조금만 배가 아프고 열만 나도 대신 아프고 싶다고 걱정 걱정을 하시는데 그 심정이 얼마나 고통스웠을까. 형이 3 살 때 맹장 수술을 하기 전까지 배아프다고 하고 먹지도 못하고 토하는데도 소아과에서 단순 감기로만 알고 처방해주었다고 했다. 큰 병원 응급실에서도 못 발견하고 또 다시 시름시름 않고 있는 형을 업고 서울역 소아병동에 가서 무조건 입원 시켰는데 배가 불러와서 급하게 맹장 수술한 일은 엄마 아빠 두 분이 겪은 가장 가슴 아픈 일이었다고 했다. 너무 어리니까 맹장을 진단하기 어렵고 배가 아프다고 외과 수술로 이어지기 쉽지 않아 복막염까지 진행된 후에야 수술을 받은 아주 위급한 상황이어서 수술 받는 동안 부모님 가슴을 엄청 졸이시고 수술 후 이틀 중환자실에 있는 3살 형이 엄마를 찾는 것을 보시곤 밖에서 엄마는 계속 우셨다고 했다. 그 트라우마 때문인지 형은 초등학교 때까지 엄마와 떨어져 있는 것을 몹시 불안해 여기는 분리불안 증세가 있어서 부모님이 많이 걱정하셨다. 그 때 일을 살면서 가장 힘든 일이었다고 했다. 자식이 아픈 것처럼 부모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은 없다는데 사랑하는 이들과 이별하게 만는 참혹한 전쟁에 참 잔인하고 마음이 아팠다.
이에 관한 얘기도 엄마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엄마가 어릴 때 하도 이가 많아서 머리를 길러본 적이 없었단다. 할머니가 엄마와 이모들의 머리를 매일 참빗으로 빗어 이를 잡아주었는데 잡아도 계속 나왔다고 했다. 머리를 자주 감을 수도 없고 잘 씻지 못하고 빨래도 못하니 비위생적이었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어릴 때 엄마 집에 펌프가 놓여 지하수를 끌어올리면서 물 사정이 나아져 물을 끓여 씻을 때면 너무 좋았다고 했다. 큰 대야에 물을 받아 방에서 목욕을 했는데 겨울이면 오남매의 목욕은 큰 연중행사였을 정도라니 다섯 아이들을 목욕시킨 할머니도 참 대단했다. 동네에 대중목욕탕이 생기면서 나중에는 편하게 목욕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고 했다. 지금은 집집마다 욕조에 뜨거운 물을 마음껏 쓸 수 있으니 얼마나 풍요로운가. 하지만 물질만 풍요할 뿐 이 당시 사람들보다 마음은 더 가난한 것 같고 감사를 모르고 살면서 지금의 풍요를 당연하게 여기는 것 같아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