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퇴사하던 해 우리 부부의 버킷리스트였던 제주살이는
두고두고 잘 한 일로 기억 남는다. 한 달 살고 싶었지만 여건이 되지 않아 두 주 살이로 만족했지만 충분했다.
처음에는 두 주간의 시간이 아주 긴 것처럼 느껴졌는데 하루 하루 지내다보니 금방 흘러가 버렸다. 통장에서 돈이 금방 빠져나가는 것처럼 그야말로 쑥쑥 시간이 지나가버렸다.
먼저 숙소는 남편이 여기저기 알아보다가 중문에 있는 빌라의 투룸을 예약했다. 저렴한 비용으로 계획을 잡다보니 비싼 펜션이나 호텔이 아닌 원룸을 택했다. 렌트비에 두 주 지낼 비용 등을 따져서 줄일 수 있는 것들은 줄이기로 했다. 침대 하나에 화장대. 주방쪽에 가스렌지. 냉장고. 전자렌지. 세탁기 등 필요한 것은 모두 있어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아침은 숙소에서 빵과 커피. 누룽지와 계란후라이. 찐계란이나 토스트로 간단히 먹고 나갈 준비하고는 발길 닿는대로 다녔다. 하루는 동쪽으로 하루는 서쪽으로 정해가며 노선이 비슷한 곳으로 일정을 잡았다. 오름과 올레길 일정도 빼놓지 않아 날씨가 좋은 날에는 어김없이 다녀왔다.
용눈이 오름. 곶자왈. 거문 오름. 우도와 마라도. 성이시돌 목장. 바다 둘레길과 올레 코스 등 그 동안 시간이 부족해 가보지 못한 곳들로 주로 일정을 짰다.
예전 봄에 왔을 때 청보리를 보러 가파도에 다녀왔다. 바닷 바람에 흔들리는 청보리의 푸르름에 흠뻑 빠졌다. 한 바퀴 산책하면서 고즈넉함을 만끽했다면 이번에 간 마라도는 최남단 끝에 있는 섬으로 둥글고 작은 성당이 트레이드 마크처럼 자리잡고 있었다. 골목골목 담벽에 붙어놓은 조개껍데기가 아기자기하게 예쁜 곳이었다. 광고에 나오면서 유명해진 마라도의 짜장면 맛도 일품이었다.
예전에 우도에 들어갔을 때는 차를 가지고 갔는데 지금은 환영 오염 때문에 차를 갖고 들어갈 수 없는 대신 순환 버스가 생겼다. 다섯 군데 정도 정차해서 관광을 하고 다시 버스를 타니 편하고 복잡하지 않아 좋았다. 2~4인용 전기 자동차도 있어 젊은 연인들이 많이 이용했다. 우도의 바람의 언덕과 에머랄드빛 바다는 언제 봐도 시선을 빼앗긴다.
이번 여행에서 내가 가장 기대했던 곳은 거문오름과 곶자왈이었다. 거문오름은 예약해야만 갈 수 있는 유네스코 자연 유산이다. 다른 오름들과 크게 다르진 않아도 때묻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꽤 긴 거리에 가파른 길까지 내려오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곳곳에 일제가 파놓은 진지 동굴도 볼 수 있었다. 일본이 군사시설로 이용된 아픈 역사까지 담겨있다는 해설사의 안내를 받아 설명을 들으면서 숲으로 우거진 오름을 걸었다. 삼나무 숲길. 이름모를 들풀. 우람한 나무들. 지저귀는 산새. 은은한 억새밭길까지. 제주의 아름다움을 또한번 실감했다. 분화구까지 한 바퀴 돌며 두세 시간 이상을 걷고 내려왔지만 힘든줄 몰랐다. 한라산의 분화구보다 3배가 크다는데 한라산은 물이 고여있지만 거문 오름의 분화구는 우거진 숲이 만들어져 예전엔 농사도 지었다고 한다. 전망대에서 보니 한라산까지 보이며 제주의 아름다움이 선선한 바람과 함께 한눈에 들어왔다.
곶자왈 도립공윈 역시 자연 그대로 유지된 숲길인데 한참을 걷다보니 데크로 이어진 길 사이사이로 아픈 역사의 흔적들이 남아있었다. 제주 4.3 사건 때 숨어지내던 동굴이 보였고 그것을 그대로 유지시켜 놓았다. 숨어있는 사람들을 끌어내기 위해 불을 지르고 나오는 대로 죽였다는 끔찍한 비극적 역사가 떠올랐다.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일이었다. 제주시에선 곶자왈을 자연 탐방과 역사 탐방을 목적으로 기억의 공간으로 조성될 예정이라고 한다.
미리 제주 4.3 평화 공원에 다녀온 터라 일어나선 안 되었을 비극이 또다시 연상 되어 마음이 아팠다. 한국 전쟁 이후 가장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니 이렇게 아름답고 평화로운 제주에 숨어있는 아픈 역사가 아닐 수 없다.
제주 평화공원 가까운 곳엔 절물 휴양림이 있다. 사려니 숲길. 비자림. 치유의 숲 모두 다녀왔지만 절물 휴양림은 처음이었다. 다른 숲길과 분위기는 비슷했지만 조금씩 달랐다.
절 옆에 물이 있어서 만들어진 단순한 이름이라는데 지금은 절은 없고 약수암만 남아있다. 30년 된 삼나무가 주를 이루고 데크로 된 숲길을 따라 걸으니 산새들의 소리가 들렸다. 갈림길로 나뉘어진 산책로를 선택해 걷다보니 소나무 숲길이 즐비하게 이어져 피톤치드를 마음껏 마시니 건강해진 것 같고 여유와 평온함을 누렸다.
오름이나 올레길에 다녀온 날은 힘들어서 일찍 들어가서 쉬기로 했다. 들어가면서 시장에 들려 생선을 사서 숙소에 와서 구워 먹기도 했다. 점심. 저녁을 대부분 사먹었지만 저녁 시간이 이르다 싶은 날엔 실한 자반과 갈치를 사다 구워서 저녁을 먹었다. 후라이팬이 없어 마트에서 후라이팬을 하나 사고 쌀도 4kg. 계란 한판. 식용류 등을 사다놓고 가끔 저녁을 해먹는 소소한 재미도 있었다. 집에선 생선 냄새가 진동하다 보니 생선을 좋아해도 잘 해먹지 않았다. 여기선 편한 마음으로 된장찌게나 김치찌게. 생선으로 가끔 저녁을 해먹으니 마치 소꿉장난 하는 것 같았다.
신혼 때 둘이 살았다면 이랬겠지 하는 마음까지 들었다. 신혼 2년을 시댁에서 대식구로 함께 살다가 분가해서 그런지 아기자기한 신혼을 뺏긴 기분이었는데 그 기분이 느껴졌다. 물론 감정이 그 때와 절대 같을 순 없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