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일기를 쓰시는 줄은 몰랐다. 나중에 투병하시면서도 일기를 쓰신다는 것을 알고 그 필체에 한 번 놀라고 그 필력에 또 한 번 놀랐다.
학창시절 비교적 글을 잘 쓴다고 인정받은 것이 책을 좋아한 때문인 줄 알았는데 아버지께 물려받은 것 같았다.
어린 시절의 상처. 전쟁 당시 피난 이야기. 엄마 만나 결혼한 이야기. 자식들 이야기. 투병까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철도 공무원으로 퇴직하신 뒤 소일거리로 경비일을 하신 아버지는 위암수술 하시면서 일을 쉬고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일기를 쓰신 것 같았다. 가슴 아픈 것은 투병하실 때 손에 힘이 없으셨는지 삐뚤빼뚤해진 필체를 보고선 울컥했다.
아버지 일기장에는 후회와 고통과 회한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시한부 선고를 받으시고 죽음을 준비하면서 쓰신 심경 고백까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유품을 정리하면서 아버지 일기장을 깨끗하게 다시 정리해드리고 싶었다. 꽤 많은 분량이라 차일피일 미루다가 남동생이 그대로 간직하고 있던 일기장을 최근 다시 읽어보았다.
아버지의 일기 중 나를 가장 놀라게 한 것은 한국 전쟁 당시 피난 가셨을 때 이야기였다. 그 당시 아버지는 9살이었는데도 너무 생생하게 기억하고 계셨다. 비행기가 지나가면서 기차역이 폭파되어 기차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끔찍함도 목격하고 굶주림에 음식을 찾아헤매고 동생이던 작은 고모를 잃어버렸다가 찾은 일.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는 과정까지 자세히 담겨있어 놀라울 뿐이었다. 너무 충격적인 일을 겪어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으리라 짐작된다.
아버지가 어릴 때 받은 상처와 지독한 열등의식도 담겨있었다. 2남 2녀 중 차남이었던 아버지는 장남인 큰아버지만 편애하신 할아버지로 인해 상처 입고 형과 비교당하며 열등감에 시달렸다. 성실하고 책임감까지 강한 큰아버지에 비해 끈기 없고 자유로운 아버지를 못 마땅해하신 것은 장남을 우선시하던 그 시대엔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음주가무까지 좋아하고 하릴없이 빈둥대는 아버지에게 눈길도 안주신 모양이다. 형만 고등학교에 보내고 아버지는 중학교 졸업만 시키신 일은 아버지에겐 가장 큰 상처였고 일찍 장가 보내시려고 혼사를 넣자 일찍 군대를 가버리셨다. 아버지는 이런저런 일로 할아버지 눈밖에 났고 할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감싸주시느라 늘 마음졸이셨다. 아버지는 할머니의 아픈 손가락이었다. 중간에서 할머니가 감싸주시지 않았다면 더 천덕꾸러기에 상처투성이 아버지로 엇나갔을지도 모른다.
군대에 제대하신 후 버스 안에서 다소곳하고 앳된 엄마를 보고 한 눈에 반해 쫓아다니면서 결혼한다고 하셨을 때 두 분이 기뻐하신 것은 당연했다. 아버지 나이 26세. 엄마 나이 23세였다. 고모부를 통해 아버지를 철도 공무원으로 일하게 하시고 청주에 계신 외할아버지의 존함만 알고 찾아가셨다. 동네에서도 평판이 좋으셨던 점잖으신 외할아버지의 인품을 보고 할아버지는 엄마를 더 마음에 들어 하시곤 결혼을 허락 받았다.
8남매 중 차녀였던 엄마는 시골에서 농사짓고 사시는 가난한 부모님께 생활비를 보태고 4명의 남동생 학비를 대주는 것을 삶의 보람으로 여기며 천천히 결혼하려 했지만 느닷없이 아버지를 만나 급히 결혼하게 됐다. 자그마한 체구의 엄마에겐 아버지의 큰 키도 훤칠한 얼굴도 모두 맘에 안 들고 부담스럽기만 했다고 하셨다. 하지만 아무 것도 없던 가난한 외할아버지는 이불 한 채만 갖고 오면 된다는 친할아버지의 말씀을 고맙게 여기고 땅도 제법 있고 동네에서 존경받는 유지였던 박식한 할아버지 덕분에 가난하게 살지 않아도 되겠다며 안심하고 엄마의 결혼을 허락하셨는데 나중에 두고두고 후회하셨다.
결혼 후에 아버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후일에 엄마한테 왜 아버지 같은 분과 결혼했냐고 물었더니 엄마는 세상 모든 남자가 다 외할아버지 같은 줄 알았다고 했다. 자상하고 점잖으시며 자기 할 일을 묵묵히 하시던 한결같은 할아버지는 엄마에게 세상 모든 남자들의 롤 모델이었다.
내가 겪은 아버지의 모습이 싫어 나중에 만날 남자의 닮지 말아야 할 롤 모델로 삼은 것처럼 말이다. 엄마는 아버지 같은 남자도 있다는 걸 살면서 처음 알았다고 하셨다. 연예 경험이 없던 순진한 23살 엄마로서 결혼 후 줄줄이 낳은 오남매를 키우고 지켜내기 위해 다른 선택 없이 헌신과 희생을 다하셨다.
신혼 때까지는 부부애가 좋으셨지만 철도 근무 하시던 아버지가 지방으로 가는 열차의 역무원으로 다니시면서 밖으로 도셨고 내리 딸만 넷을 낳자 엄마를 외면 하기 시작했다. 남아선호사상이 팽배했던 그 시절에 엄마는 죄인처럼 아무 말도 못하고 참고 사셨고 어린 우리에겐 그저 두려운 아버지였다.
내가 3학년 때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아버지는 마음 붙일 곳이 없어보였으며 할머니를 무척이나 그리워하시면서 술만 드시면 우시고 할아버지를 무척이나 원망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남동생이 태어나서 누구보다 기뻐하시던 할머니였다. 할머니로선 이제 아들이 가정에 충실하지 않을까 하는 바람과 엄마로선 귀하게 태어난 아들을 금지옥엽으로 키울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나와 5살 차이 나는 남동생의 돌 사진을 찍으러 엄마를 따라 사진관에 갔다. 내가 7살쯤인데도 그 기억이 너무 생생했다. 흑백사진 한두 장만 있던 우리 딸들로선 사진관도 한복을 입고 찍은 남동생의 칼라 돌 사진도 신기하기만 했다. 다칠세라 아들 아들하며 키운 일이나 아들을 낳았으니 아버지가 가정에 충실할 거라고 기대하던 엄마는 측은함의 대상이었고 아버지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실망의 대상이었다. 할아버지까지 돌아가셨을 때 아버지의 표정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끝까지 화해하지 못해서였는지 할머니때처럼 슬퍼하지 않으셨다.
중학교 때 모파상의 소설 <여자의 일생> 을 읽으면서 주인공 잔느와 현실의 엄마처럼 절대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한 번 태어난 인생인데 태어날 때는 내가 선택할 수 없어도 성인이 된 후 내 삶은 내가 선택할 수 있으니 여자라는 이유로 절대 그들처럼 부당한 대우를 받고 참고 살지 않겠다고 말이다.
아무 능력 없고 무기력한 여자가 아닌 당당하고 자신감 있는 딸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경기도의 작은 학교에서 대학에 합격했을 때 누구보다 자랑스러워 하셨던 아버지였다. 교사가 되지 못해 실망을 드린 것 같아 죄송했다. 아버지께 더 인정 받고 싶었던 스스로에 대한 실망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상한 건 아버지를 참 많이도 원망했는데 나이가 드시고 병약해지시고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보니 그저 그립고 애틋한 아버지였다. 결혼 후 네 딸들과 아버지 사이는 돈독해졌고 자신의 삶을 후회하며 미안하다는 말을 자주 하셨다. 애증의 관계이면서도 부모와 자식은 끈끈할 수밖에 없었다. 원망했지만 용서했고 미워했지만 이해했고 돌아가시기 전까지 사랑을 다 쏟아 후회가 없었다. 돌아가셨을 때는 태산이 사라진 것 같은 허전함마저 밀려오면서 지금은 그저 그리운 아버지가 되었다.
아버지의 일기장을 보면서 아버지를 조금은 더 이해하게 되었다. 자식들에게 사이좋게 지내라며 유난히 형제애를 강조하신 이유에는 애틋한 사랑을 간절히 갈구했던 마음 때문이었다. 할머니의 사랑만큼 할아버지 사랑도 듬뿍 받고 자기밖에 모르는 냉랭한 형이 아닌 동생을 감싸주는 따뜻한 형이었다면 아버지 인생은 달라졌을까.
그립고 보고 싶고 사랑하는 아버지. 다음 생에서는 후회없는 인생을 사시고 딸들의 존경받는 아버지로 뵙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