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이 코앞이다. 귀성길 전쟁에서 벗어나서 마음이 홀가분해진지 벌써 3년 됐다. 결혼 30년 동안 25년 가까이 시골에 사시던 부모님을 뵈러 가던 명절 귀성길은 마음의 큰 부담이었다. 1년에 두 번 명절에 어머님. 아버님 생신에 여름. 겨울 애들 방학하면 한 번씩 내려가던 장거리 스트레스는 해마다 몇 번씩 찾아왔다.
명절 귀성에서 벗어난 것은 아버님이 12년 전에 돌아가신 후에도 혼자 시골 생활 하시던 어머님이 코로나가 시작되고 건강이 안 좋아지면서 자식들이 있는 일산으로 이사오신 뒤로부터이다.
이젠 명절이 다가와도 부담이 훨씬 줄었다. 그렇다고 일이 줄어든 건 절대 아니다. 아이들이 크면서 어릴 때처럼 정신없지는 않더라도 4형제인 시댁. 5남매인 친정은 여전히 만만치 않은 가족 모임이다.
설날과 추석 중 그나마 설날이 편했다. 설날은 어머님이 미리 만들어 냉동실에 넣어둔 만두 덕에 일이 줄어든 반면 추석은 해마다 다같이 둘러앉아 송편을 빚었다. 그 양도 어마무시한데다 솔잎까지 넣어 찐 송편에 솔잎 떼내는 일은 손이 참 많이 간다.
집안 분위기상 아버님 외에 권위주의적 남자들은 없어서 송편도 같이 만들고 음식도 많이 도와주는데도 고된 건 사실이다. 제사도 안 드리고 우리가 먹을 음식만 준비해도 대식구이다 보니 만만치가 않다.
세 며느리가 의기투합해 음식 장만하고 어머님도 거들어주시지만 전 부치고 갈비 재우고 각종 나물에 이틀 동안 대식구 상차림에 설거지. 뒷정리까지 하고 나면 허리도 아프고 명절 휴유증이 크다.
명절을 쇠러 가지 않은 적은 딱 한 번이었다. 둘째가 9월에 태어나 마침 추석과 겹치면서 산후 조리할 때였다. 그야말로 처음 누리는 명절의 자유가 마음을 편하게 했다. 며느리들에게 명절은 그만큼 큰 부담이다.
충남 공주까지 기본 3~4시간 귀성 전쟁을 치렀다. 예전엔 도로 상황이 지금처럼 좋지 않을 때여서 새벽 6시에 출발해 오후 6시에 도착한 적도 있었다. 최장 12시간 걸렸다. 주말이 겹치거나 명절 연휴가 짧을 땐 더 심하다. 지금은 대체 휴일도 있고 임시 공휴일 등 국민들의 편의를 많이 봐주지만 예전은 꿈도 못꾸었다.
5일제도 없이 어린 아이들 둘 데리고 시골에 내려가려면 그야말로 정신이 하나도 없다. 시간이 빠듯할 때면 아이들 둘을 데리고 지하철 타고 남편 회사 앞으로 가는 수고를 기꺼이 감수했다. 바로 출발하면 그나마 몇 시간이라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이 방법 저 방법 동원하며 명절 귀성길에서 겪은 수많은 기억들로 가득하다.
네비게이션도 없던 시절 지도만 보고 차가 막힐 때면 논두렁길까지 조금이라도 빠른 길이 있으면 빠져 나가기도 하고 12시간 정체 땐 아산만 방조제쯤에서 차가 꼼짝도 안해 내려서 컵라면을 먹던 사람들까지. 화장실이 급해 이리저리 찾던 기억 등 이런 저런 에피소드가 참 많다. 아이들이 지겨울 법도 한데 순한 덕에 뒷자리에 앉아 잠을 자거나 둘이 놀이하면서도 투정 한 번 안 부린 일은 고마울 뿐이다.
겨울 어느 날은 폭설이 내려 와이퍼로도 쌓이는 눈이 감당이 안 되고 앞도 보이지 않아 정체될 때마다 잠시 내려 쌓인 눈을 한 번씩 쓸어주며 거북이 걸음으로 겨우겨우 도착한 일도 있다. 어쩔 수 없이 늦게 고생고생하며 도착했는데도 어머님과 형님들 눈치만 보는 며느리의 마음이란...
천둥 번개가 치던 어느 귀경길 때는 애들이 무섭다며 겁을 먹은데다 내리치는 벼락까지 선명히 보여 오금저린 일도 있었다. 날씨도 시간도 늘 미리 확인하며 최대한 빠른 도착이 명절의 관건이었다. 최소한 이틀을 보내고 차가 막힌다며 서둘러 올라가라던 어머님의 배려로 명절 당일 아침만 먹고 출발해 귀경길엔 주로 차가 막히지 않게 잘 도착했다.
차에는 바리바리 싸주시던 양념과 농산물. 음식들로 가득했으며 며느리들에게 베푸신 따뜻한 배려와 정성 덕분에 올라올 때의 마음은 항상 훈훈했다. 그런 어머님께선 85세로 아직 정정하시며 30분 거리 가까운 곳에서 명절을 보내니 여간 편하지 않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시골에서 명절을 보내며 쌓인 추억도 크다. 추석 때는 송편 빚고 밤 주우러 다니고 설날 때는 아빠가 만들어준 연을 날리고 눈이 오면 비닐 푸대 갖고 나가서 언덕에 올라 타고 내려오며 자연을 벗삼아 놀던 일과 대식구가 모여 했던 윷놀이 등의 기억들을 아련히 갖고 있다. 시골에서 보내는 명절은 아이들 정서엔 더할 나위 없이 좋다.
가끔 연휴가 짧을 때 역귀경 하셔서 우리집에서 명절을 보낸 적이 있었다. 형님집보다 우리집이 넓어 기꺼이 먼저 제안하며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귀성 전쟁만 안 치러도 한결 편할 거란 내 생각은 오산이었다.
며느리 셋이 음식을 맡아 각자 하나씩 준비하기로 했어도 매끼마다 다른 음식을 준비해야 하는 부담은 처음부터 끝까지 고스란히 내 몫이었다. 시골에서야 어머님 집이니 없으면 없는대로 먹었지만 막상 우리집이니 또 달랐다.
거창한 손님을 치르는 기분에 뒷정리도 만만치 않았다. 몇 번 명절을 치르니 귀성길이 힘들어도 내려가는 것이 낫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지금은 그 수고가 한결 줄어 몸도 마음도 편해져서 명절 모임을 기쁘게 감당한다.
요즘처럼 바쁘게 살면서 가족이 모두 한 자리에 모여 화기애애함을 느끼게 하는 명절은 며느리들에겐 피할 수 없는 부담이지만 가족을 위해 마음을 다해 준비한다.
이런 명절 분위기도 우리 세대면 끝나지 않을까 싶다. 올해도 6일이란 긴 연휴가 주어지자 공항은 붐비고 해외여행자는 늘었다. 어머님들 세대에서 이제 우리 세대가 시어른이 된다면 명절에 큰 의미를 두지 않거나 더 이상 다음 세대에게는 명절 부담은 주지 않게 될 것 같다. 어쩌면 아예 기대조차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시대가 변했으니 분위기가 달라지는 건 당연한 일일 테지만 가족이 정을 나누지 못할 정도로 멀어지거나 의미까지 축소되어선 안 된다.
우리 민족의 고유한 명절은 온고지신의 정신과 오랜 전통과 문화이자 의미가 퇴색 되어선 안 되지만 간소화 된 명절을 보내게 될 건 분명하다. 어떤 명절 분위가 될 지는 곧 겪게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