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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낙타 Oct 20. 2023

네, 아들만 둘입니다.

나는 아들만 둘을 둔 엄마로 속칭 ‘목메달’의 주인공이다.


작은 아이의 산전 진료 중 큰아이 성별을 묻던 의료진이 나보다 더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고있자니 우리 사회에 아들만 둔 엄마가 얼마나 애처로운 대상인지 알 수 있었다. 양옆으로 두 아들 손을 잡고 걸을 때면 '아들만 둘이에요?'라는 말을 시작으로 위로 아닌 위로를 톡톡히 받는다. 힘들어서 어떻게 하느냐, 에너지가 감당되느냐, 다 크면 소용없는 자식이 아들이다는 말과 마지막으로 딸 하나 낳으라는 말까지. ‘아들이라도 괜찮아요.’라고 한마디 뱉어본들 ‘딸 만하겠냐, 딸이 없어봐서 그런 소리를 한다.’라는 말로 이어지니 결국 ‘네, 힘드네요.’라는 말을 내뱉고 나서야 아들만 갖은 불쌍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     


첫 아이부터 딸을 희망했던 남편은 작은아이도 아들이라는 소식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고 나의 엄마는 큰일이 났다고 했다. 남편은 자식 키우는 재미를 덜 보게 생긴 것에, 나의 엄마는 노년에 외로울 딸에 대해 걱정하셨다는 것이 달랐을 뿐이다. 딸만 내리 셋을 낳아 막내딸을 낳고는 서운함을 감추지 못한 나의 엄마다. 그런데 키우고 보니 딸 한만 자식이 없는 것인지 아들 못지않게 딸도 필요한 것인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아쉬움 속에서도 좋아해 주신 분이 계시니 바로 시부모님이다. 요즘 시대에 대(代)를 이어야 한다는 생각에 아들 낳기 원하는 며느리가 있을까 싶고 꼭 아들을 낳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시댁 어른도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깊숙이 들여다보면 자녀 성별에 대해 며느리로서의 부담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딸만 낳은 금메달이라 주변의 부러움을 받는 엄마라도 아들 부담을 안고 있거나, 아들만 낳은 목메달이라 우울했던 엄마가 기대 이상의 시댁 반응을 경험한 이야기는 심심치 않게 들려왔다.


임신 중인 많은 엄마가 그렇듯이 아들, 딸 상관없이 건강하게만 나오길 기도했다. 아이는 무조건 둘을 낳겠다는 생각에 큰아이가 아들이니 작은 아이도 아들이길 바랐다. 이왕이면 같은 성별에 비슷한 관심사로 자라면 얼마나 죽이 맞아 신날까 싶었다. 물론 그리되어 참 좋다. 날 위한 아이보다 아이들을 위한 형제를 원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나의 말을 순수하게 믿는 사람은 없는 듯하다.     


아이들은 한때도 몸을 가만두지 않는다. 우당탕탕, 쿵쾅쿵쾅 정신이 하나도 없다. 높낮이가 있는 곳이라면 몸소 높이를 체험해야 직성이 풀리는 듯하다. 앞구르기, 옆 구르기까지 정말 가관이다. 자기들끼리 ‘공격 놀이’를 하자는 말에 내 귀를 의심했다. 발사, 변신, 공격, 던져, 지금이야!!! 등등 여자 엄마인 나로서는 여전히 깜짝깜짝 놀라는 말이다. 아이들은 늘 레슬링을 한다. 막상 그것이 레슬링인지 아이들은 모르나 내 눈엔 영락없는 레슬링이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고 한 번도 보지 않은 레슬링을 아이들은 밤 마다한다. 왜 몸을 부딪치고 쓰러뜨리며 눌러대는 것인지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행동이다. 목청은 또 왜 그렇게 큰지. 가끔은 텔레비전 소리를 죽이고 화면만 본다. 어릴 적 내가 하던 소꿉놀이처럼 올망졸망 모여 사부작사부작 노는 일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한여름 뙤약볕에 축구 하는 이유는 ‘그냥’이라 하지 않던가. 특별한 목적 없이 인간 본연의 신체 에너지를 발산하는 행위 자체는 순수한 매력이 있다. 난 이것을 아들, ‘사내아이’의 매력이라 이름 붙였다.   

  

딸을 두지 못한 엄마를 안타까워하는 이유는 분명해 보인다. 여자는 대화를 통한 공감으로 마음을 나누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 보니 다정한 말 한마디 없이 각자 방에 들어가 묵언 수행할 아들만 둔 엄마의 외로움과 쓸쓸함이 걱정일 것이다. 생각이 흐릿해지고 몸이 둔해진 나의 늙음을 빠릿빠릿하게 챙겨줄 자녀는 아무래도 딸이 더 야무질 것이다. 가끔 말수 적은 남편과 아들만 둘을 둔 내 노년의 ‘꼴’을 상상하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아들이 둘이면 둘 중 하나는 딸 노릇을 한다는 어른들 말에도 괜히 그 아이에게 부담을 주는 것 같아 그마저도 마땅찮다. 딸 없는 노년의 삶이 건조하고 팍팍하진 않을까 걱정스럽다만 답 없는 일에 골머리 썩힐 것 없다. 쉬지도 않고 떠들어대는 지금의 두 아들을 곁에 두고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현재를 즐기는 것 말곤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우리 모두 관계 속에 엮여 사는 존재라 하여도 건강한 관계가 오래가고 의미 있다. 서로에게 지나치게 의존적인 태도는 좋은 결과를 낳지 못한다. 각자 독립된 생각과 그에 맞는 성취로 자신의 삶을 채워가야 다른 이에게 부담 없는 존재가 된다. 친구는 물론 부부와 부모 모두 마찬가지다. 더러 친구 같은 딸을 두는 것이 엄마의 로망으로 여겨지는 듯하다. 그러나 나는 자녀를 친구로 삼아보고자 생각한 적이 없다. 친구 같은 딸(혹은 자식) 또한 날 위한 존재로 생각하는 것이니 평소 존경하는 스님의 말씀대로 독립한 자녀는 마음속에서 떠나보내는 것이 현명한 처사일 것이다.


아이는 아이일 뿐 한 생명을 세상에 내놓고 자기 날개를 펼쳐 날아가기 전까지 책임 있는 양육자로 존재한다면 아들이건 딸이건 성별이 중요할까. 그래도 사람들 말 따라 딸 없는 내 노년의 시간이 걱정이라면 지금이라도 정신 바짝 차리고 혼자도 잘 노는 법을 익혀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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