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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십육도씨 Apr 25. 2021

밤빛 머루

21.04.24

나에겐 산문, 에세이란 수능시험 문항의 일부일 뿐이었고, 때론 신문 사설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지금 읽고 있는 책이 그 생각을 바꿔놓았다. 김 혼비 작가님의 『아무튼, 술』이라는 에세이 책인데, 읽으면서도 중간중간 피식하고 웃기도 했고 소리 내어 깔깔 웃기도 했다. 술이나 차에 관해서는 줄곧 정보 서적을 읽었는데, 이렇게 술에 얽힌 일화를 담은 에세이를 읽으니 또 다르다. 술 마시는 걸 좋아하긴 해도 요즘은 술 한두 잔만 마셔도 금방 취기가 오른다. 그래서 함부로 나를 술꾼이나 애주가라고 지칭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술을 읽으면 난 술꾼이 되기엔 정말 한참 멀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님의 술술 읽히는 글에 나도 모르게 술이 마시고 싶어 졌다. 그중에서도 소주.

문득 편의점에서 병이 예뻐서 사놓고 냉장고에 보관해 둔 술이 떠올라서 바로 꺼냈다.


술 이름은 밤빛 머루. 증류주라는 걸 봐서 소주는 소주인 것 같다. 머루가 들어가서인지 아주 옅은 와인 향이 났다. 마셔보면 역시 맛은 와인이 아니라 소주인데 비슷한 도수의 일반 소주에 비해 목 넘김이 굉장히 부드러웠다. 쓴맛이 적고 화-한 느낌도 없었다. 그래도 16도는 16도다. 안 그래도 술이 한참 약해졌는데 3잔이 들어가니 취기가 올라오고 솔솔 잠이 온다. 아쉬워서 술안주 삼아 책자 하나를 꺼냈다.

 얼마 전에 송호 작가님의 워크숍을 들었었다. 작가님이 14일간 자신의 에세이나 그림 등 매거진을 보내주시면 내가 그걸 읽고 생각한 것을 자유로운 형식으로 답장하면 되는 것이었는데, 나는 마지막 날에 거의 여름방학이 끝나고 밀린 일기장을 채우는 느낌으로 1화부터 14화까지 느낀 점을 적어서 보내드렸다. 감사하게도 작가님이 손 편지와 함께 14일간의 매거진을 책자로 만들어 보내주셨는데 아직 개인적으로 잘 받았다고 감사 메시지를 못 보냈다.(이 자리를 빌려 책자 잘 받았습니다 작가님 14일 내내 재미있는 경험이었어요 (수줍))

매거진을 다시 읽어보니 공감이 가고 재밌었던 기억들에 술기운으로 감상이 더해졌다. 술은 왜 이렇게 씁쓸해서 삶이 씁쓸하다고 느껴질 때마다 떠오르던지. 막상 그때 마시면 씁쓸함은 어디 가고 달기만 한 건지.


글을 자주 쓰거나 그림을 자주 그리는 것도 아니지만 언제나 이런 걸 해서 무슨 의미가 있지? 하는 내적 갈등이 나를 주저하게 만들곤 했다. 아무도 신경 쓰는 사람이 없는데 도말이다.

그런데 에세이를 읽다 깨달았다. 내가 책을 읽고 라디오를 듣는 데엔 어떤 의미, 어떤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냥'이었다. 재밌으니까.

안 그래도 주변 사람들과 일상 이야기를 하는 일이 줄어들었다. 그저 한가하기만 한 나의 시시콜콜한 일상을 메시지로 주고받는 것 때문에 주변 사람들의 소중한 시간을 빼앗을까 염려되는 것도 있었다. 대신 에세이를 읽거나 라디오를 들으면서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의 일상을 들으니 그저 재미있었다. 굳이 일상을 알아야겠다! 가 아니라 그냥 손에 잡혀서 그냥 들었는데 재밌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듣고 있었다.

그냥. 생각해보면 내가 태어나려고 태어난 것도 아니고 그냥 태어났으니까 사는 건데 꼭 뭔가 의미 있고 대단한 걸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이란 말에도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있다. 그중에 3가지로 꼽자면

1. 결과가 좋을지 나쁠지 몰라도 일단.

2. 아무 의도나 의미 없이.

3. 어떠한 일에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상대방에게 굳이 설명해봤자 소용없기에 둘러대는 말.

그냥~/ 그→냐↗앙↘

나는 아무래도 그냥 하라는 말뜻을 받아들이는데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내가 그동안 받아들인 의미가 1이었다면 나에게 필요한 건 2였다. 1번 같으면 만약 내가 실패한다면? 에 대한 리스크를 계산하느라 어떤 걸 시도하는 것조차 꺼려졌다. 그래서 남들이 그냥 해~ 하는 말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어차피'그냥 해'라는 말을 한 사람도 내가 실패할지 성공할지 모르지만 시도했을 경우 그 결과에 대해 책임져주지는 않는다. 내가 우물쭈물하고 있는 이 상황이 빨리 지나가길 바랄 뿐.

 하지만 2로 받아들이면 마음이 편하다는 걸 알았다. 어차피 누가 돈 주고 시켜서 하는 일도 아니고 '그냥' 하는 건데, '그냥' 하면 될 걸 왜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나 의미를 붙여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나도 참 복잡하게 산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에게 자꾸 그래서 어쩌라고? 이거 해서 어디에 쓸건대? 하는 질문이 떠오르면 그냥 그렇다고! 하는 답을 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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