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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십육도씨 Jan 14. 2022

100 파이퍼스 위스키

22.01.15

이럴 줄 알았다.

벌써 1월 중순이다.  1월은 1월 1일만 지나면 나머지는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간다.

올해는 부지런히 작업하겠다고 다짐했는데 집에만 있으면서 취미만 몇 가지 더 늘어났다.

뜨개질로 행잉 바스켓을 만들어서 우리 집 반려 조 민식이를 위한 둥지를 만들었다. 분명히 하라는 대로 했는데 자꾸 거대해지는 바람에 세, 네 번은 풀었다 다시 만들어서 털실이 너덜너덜 해졌다. 또, 원단을 사다가 손바느질로 인형 한복도 만들었다. 물론 손재주가 좋지는 않아 실밥도 다 터지고 난리가 났지만.  



 마지막으로 매일매일 영화 한 두 편씩 보면서 한 두 줄씩 감상평을 쓰고 있다. 스토리 전개나 영상 연출 공부하자고 시작하긴 했지만 결국엔 스토리에 빠져들면서 재밌다 또는 생각보다 내 취향은 아니었다, 내용 이해가 안 되었으니 해석을 찾아봐야겠다 정도로 마무리 짓는다.


1월이 되면 매번 생각나는 영화가 하나 있다. 1월 1일이 되자마자 봐야지 했는데 이제야 본다.

바로 전고운 감독, 이솜 주연의 <소공녀>


*영화 내용의 스포일러도 포함되어있습니다.


가정에 방문해서 청소하는 일을 하는 주인공 미소에겐 몇 가지 삶의 낙이 있는데 그건 바로 남자 친구, 담배 그리고  위스키.   

수입이 넉넉하지 않은데 일정하지도 않아한 겨울에도 보일러를 켜지 못한 채 생활하는데, 해가 바뀌고  월세, 담뱃값 등 물가는 점점 오르기만 한다. 결국 미소는 본인의 삶의 낙을 포기하는 대신 차라리 월세방을 나와  함께 위스키를 마시며 밴드를 했던 사람들의 집에 며칠 씩 머물기로 한다.


아마 미소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월세방이 아니라 담배를 끊고 위스키 마시지 말고 회사를 다니거나 해야 하지 않는가라던가.

회사가 체질인 사람이 얼마나 있겠느냐마는 그냥 각자의 성향과 삶의 방식이 다른 것이라 생각한다.

 또, 삶의 낙이 왜 삶의 낙일까. 사람에게  삶이 아무리 거지 같을지언정 그런 삶이라도 그것 하나로 버티고 살아가게 하는 것이다.

 미소와 달리 나는 다른 건 다 제쳐도 내가 발 뻗고 쉴 수 있는 공간이 꼭 필요한 사람이라 다른걸 다 포기해도 월세방을 사수했겠지만 미소의 선택이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다. 대학시절 자취를 했을 당시는 한 달 아르바이트비는 한 달을 겨우 버틸 정도였다. 그래서 마트에 갔을 때, 한 푼이라도 더 아끼려고 내가 좋아하는 브랜드의 제품을 두고 좀 더 싼 다른 브랜드의 제품을 샀을 때의 기분은 정말 서럽기 그지없었다. 이게 뭐라고 한 번은 폭발해서 내가 이렇게 살아야 하지? 하면서 원했던 브랜드의 제품과 함께 그동안 먹고 싶었지만 못 먹었던 과일이며 과자며 다 사는 바람에 지갑이 텅텅 빈 적이 있었다. 그래도 후회는 없었다.


미소가 차라리 한 잔에 만원이 훌쩍 넘는 위스키가 아니라 한 병에 만원 할까 말까 한 저렴한 위스키를 샀다면? 며칠 참고 돈을 더 모아서 한 잔이 아니라 한 병을 샀다면? 위스키가 아니라 미소의 취향이 위스키보다 훨씬 저렴한 막걸리나 소주였다면? 등의 합리적인 선택을 한다면 아마 내용이 극적이지 않거나 메시지가 잘 전달되지 않았을지 모를 일이다. 또, 위스키를 마시는 것 말고도 예전에 위스키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면서 즐거웠던 기억 때문에 놓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과거 같은 밴드였던 지인들의 집에서 조금씩 머물게 된다. 집은 사적인 공간이다. 밖에서 친해졌던 사람들의 집에 들어가고 그 사람들의 속사정을 알게 된다. 머물 곳이 있어도 각자의 고충은 있다.

 미소가 머물 곳을 찾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월세가 저렴하면서 적당히 살만한 곳을 찾기란 여간 쉬운 일은 아니다.  미소가 미소의 남자 친구처럼 숙소가 있는 곳에서 일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렇게 스토리는 진행되고, 미소가 늘 마시던 위스키마저 값이 오른다.



또 새해가 되었고,  물가 상승에 대한 뉴스를 보면 미소가 생각난다. 가상의 인물이지만 그래도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고 걱정된다. 그래서 미소를 떠올리며 위스키를 마시기로 했다.

집에 위스키를 마시는 사람이 없는데 왜 있는지 모를 비 아이 피 위스키 잔

영화에 등장하는 위스키는 글렌피딕으로 한 잔에 약 12000원. 나중엔 2000원이나 더 오른다. 나는 내 현실상황에 굉장히 타협을 잘하는 편이라 편의점에서 산 저렴한 위스키를 마셨다. 사실 위스키는 하이볼로만 마셨지 스트레이트로 접해본 적은 없다.

 집에 위스키 잔은 (왜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래된 샷 잔이 있긴 하다. 그래도 영화에 나왔던 위스키 잔과 얼추 비슷한 와인잔에 따랐다. 확실히 위스키의 꿀물 같은 황금빛은 매혹적이었다. 한 모금 마셔보니 도수가 40도나 되니 독하긴 독하다. 오크 맛이 이런 건가? 뭔가 나무 맛이 나는 것 같았다. 보이차의 절간 같은 나무 향과는 또 다른 냄새다.  아직 위스키에는 길들여지지 않아서 그런가 스트레이트로 마시는 것보다는 하이볼로 마시기로 했다. 편의점 가격표엔 토닉워터에 3대 1로 섞어 하이볼로 마시라는 추천이 있었다. 과연 이 위스키는 하이볼이 더 맛있었다.

그럼 하이볼보다는 스트레이트가 더 맛있는 위스키도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글렌피딕은 어떤 맛일지 더 궁금해졌다. 나중에 꼭 소공녀를 촬영한 바에서 글렌피딕을 마셔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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