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존나 쉽게 사는 새끼"
애초부터 불공평한 세상
"모든 사람은 그 자체로 사랑받아 마땅하다"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 사랑받을 수 있는 것이다.
위 문장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한 번 떠올려 보기 바란다.
당신이 싫어하는 부류의 사람들,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가?
이는 '인간성'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가장 단적인 예로 외모. 태어남과 동시에 모두에게 무작위적으로 부여되며 누가 더 낫고, 누가 더 낮은지가 나뉜다.
세상에는 차등이 분명하게 존재한다.
이러한 차등에서 나타난 서열에서 상대적으로 불리한 사람은 선택권 없이 정해진 이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이기 힘들다.
"저 새끼는 좋은 부모 만나서 인생 쉽게 사네"
"잘생겨서 사는 게 존나게 즐겁겠다"
시기에서 비롯된 열등감 때문에, 상대의 노력과 긍정적인 면, 남몰래 갖고 있을 고통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고 싶어 진다.
상대적 악조건에 있는 내가 더 힘들고 이를 견디고 있는 내가 더 대단한 거니까,
저 조건이면 어려운 게 없어야 하며 그래야만 한다고 믿고 싶은 것이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면서.
쉬운 길은 사실 자체를 부정하여 이미 가진 자에겐 불리하고 본인에게는 유리한,
'결과적 평등'을 외치는 것이다.
결과적 평등이 당연시되는 사회는 필연적으로 몰락한다.
'나만의 가치'가, 나아가 개인의 노력까지도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에,
차등으로부터 행복감을 느끼는 인간은 삶의 의지를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좋은 것은 소수만이 가지는 것이 순리다.
무언가 상향평준화 되더라도, 세상이 상대평가라는 것은 변함없기에
어떻게든 '보통의 것'과 '좋은 것'의 차이가 만들어진다.
이 부정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내가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고 합리적인 선택을 반복해도
내 '최선의 모습'이 될 수는 있어도, '최고'가 될 수는 없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동시에 나보다 더 큰 재능을 부여받았거나, 훨씬 앞선 출발점에서 시작한 사람이 경쟁에서 승리하더라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와 패배했음에도 최선을 다한 스스로를 충분히 칭찬해 줄 수 있는 담대함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런 삶의 방식을 가진다고 해서 사람들로부터 무조건적인 격려와 인정을 받을 수는 없다.
안 그래도 서러운데 오히려 헐뜯고, 조롱하며, 자신감을 짓밟고 끌어내리려 하는 자들이 더 많을 수 있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 타인에게 인정받고, 타인보다 우월해지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갖고 있으니.
내 목표를 위해 굳건히 노력하는 것보다 상대를 격하하고 무기력한 상태로 만드는 편이 쉽기 때문이다.
하지만 건강한 마음가짐의 소유자들은 이러한 마음의 에너지를 오로지 자신에게 집중해 써나간다.
우선순위를 명확히 해서 포기할 건 포기하더라도 오로지 '내가 정한 목표'에만 초점을 두고 그에 맞게 살아간다.
이런 삶의 태도는 발전을 낳고, 성취감이 자연히 따라온다. 남들의 비방, 남에 대한 질투에 에너지를 쓰지 않는다.
그렇지만 남들의 조롱을 감내하기 힘들다면 단 한 마디면 충분하다.
'어쩌라고, 나에 대해 좆도 모르는 게.'
내 노력을 제일 잘 아는 사람은 나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