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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월 Mar 23. 2024

일을 위한 돈, 돈을 위한 일

목표와 꿈 구분하기.

 인간은 늘 풍족한 삶을 바라왔다. 의식주에서 걱정할 거리가 없고 저마다의 사치도 부릴 수 있는 그런 삶을.

 그렇기에 모든 것이 돈으로 치환되는 현대에서는 '여유로운 삶'보다 더 직관적으로 와닿는 '더 많은 돈'을 바란다. 그리고 돈만을 바라다보니 그것을 여유로운 삶을 위한 과정으로 가 아니라 목표로까지 여겨진다. 어디까지나 돈은 도구다. 많을수록 더 많은 선택지를 제공하고, 물질적인 것들부터 시간까지도 교환할 수 있는 매개체. 그것은 어디까지나 매개체이기에, x라는 삶의 목표에 다가가기 위한 도구이기에 'y라는 금액만큼 모으는 것'을 단기적인 목표로 활용해야지 그 자체를 삶의 목적이라 착각해선 안 된다.


 참 많이 일어나는 혼동이다.

 얼마만큼의 돈을 모은다는 목표는 성인들은 물론 어린아이들조차 점점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꿈이 아니라 'y만큼의 돈을 버는 일'이 꿈이라 말해버린다. 그렇게 돈만을 바라보고 당장 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이라 생각되는(대부분 가족이나 친구 등 주변인들에 의해 이 생각이 주입된다) 일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라 합리화하며 y금액만큼의 돈을 모으는 것이 꿈이 되어버린다.


 순서가 아예 뒤바뀌어버리는 것이다.

 x라는 일을 하기 위해 y만큼의 돈을 모으는 삶이 아니라, y만큼의 돈을 모으기 위해 x'라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서, 자신이 진심으로 즐길 수 있는, 결과와 관계없이 과정 자체로도 행복을 주는 일인 x와 한걸음 앞만 바라보고 합리화하며 결정한 x'은 전혀 다른 일인 경우가 많다. 간혹 어쩌다 하게 된 x'도 자신이 진심으로 즐길 수 있는 일인 경우가 있긴 하지만 그런 경우는 흔치 않다. 현재 하고 있는 일이 x인지 x'인지 헷갈린다면 간단한 질문이 있다. 당신이 비트코인이나 로또 등으로 인해, 혹은 갑자기 특별한 능력이나 인연이 생겨 평생 써도 남고 대대로 물려주고도 될 돈이 생긴다면. 그럼에도 지금 하는 일을 계속할 것인가?


 돈을 위한 행위와 행위를 위한 돈의 순서가 뒤집혀버리는 것은 참담한 문제다.

 확실한 지점이 있는 목표는 분명 성취감도 확실하고 이를 향해 나아갈 때에도 자신이 가까위지고 있다는 것이 직관적으로 보인다. 마치 진척도와 자신의 능력치가 명확한 수치로 구분되는 게임처럼. 하지만 이런 '목표'는 달성하는 순간 막대한 성취감과 함께 공허함이 따라온다. 목표는 오직 달성하는 순간을 위해 나아가는 것이다. 그렇기에 많은 경우 달성 이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없는, 공허다. 물론 새로운 목표를 통해 공허함을 피할 순 있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회피일 뿐이다. 목표는 달성하는 순간의 성취감에 비해 막대한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행복에 있어선 아주 비효율적인 것이다. 긴 시간 동안, 하루하루 목표만을 바라보며 채찍질을 하고 결승선에 도착하자마자 다음 목적지까지 다시 채찍질을 해야 하는 삶을 과연 생이 끝날 때까지 이어갈 수 있을까?


 이런 이유 탓에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바란다면 보상이 없더라도 과정 자체로도 즐기고 만족감을, 카타르시스를 줄 수 있는 '꿈'을 찾아야 한다. 목표가 아니라. 당연한 이야기지만 모든 이들이 이런 꿈을 좇고, 꿈을 즐기며 살 순 없을 것이다. 누군가가 일평생 즐기기만 한다면 누군가는 그 즐기는 삶을 위해 뒷받침이 되는 일들을 떠맡아해야 하니까. 모든 이들이 꿈만을 좇고 그 속에 빠져 행복에 겨워하는 세상은 허무맹랑한 이상론이다. 당장 우리에게는 아무리 하고 싶은 일이 있더라도 당장 내년의 삶을, 다음 달의 청구서를, 다음 주의 약속들을, 내일의 지출을, 오늘의 밥 한 끼를 걱정하기에도 너무나 바쁘니까.


 그러니 이런 소리를 한다고 지금 하는 지긋지긋하고 끔찍한 일을 엎어버리고 꿈을 찾아 떠날 필요 없다. 그래서도 안되고. 아무리 끔찍하다 한들 지금의 일을 위해 여태껏 해온 노력과 그것이 주는 생활은 분명 하루아침에 인터넷에서 몇 줄의 글을 읽고 엎어버릴 수 있을 만큼 가벼운 것이 아니니까.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단 한 가지다. 현실적으로 돈도 없고, 따라서 내일도 없는 삶에서 'x를 위한 y만큼의 돈'의 과정이 바로 이뤄질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러니 재벌 3세 막내아들이 아닌 이상 현실적으로 가능한 방법은 [X라는 꿈을 위한 Y의 돈과, Y만큼의 돈을 위한 현재의 X']의 형태가 될 것이다.


 얼마나 좋은가.

 보통의 삶을 뒤바꾸는 선택들은 이미 가진 안정감을 포기하고 가능성을 얻거나, 가능성을 포기하고 안정감을 얻는 형태인데 이 선택은 그 무엇도 버릴 필요가 없다. 단지 현재의 안정감을 챙기고 동시에 이를 꿈을 향한 선로 위에 얹어 놓을 뿐이다. 물론 꿈같이 마냥 좋은 이야기를 하기엔 현실이 너무도 각박할 수 있다. 하지만 미래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돈을 버는 것이 삶의 목표라고 한다면 그것이 주는 감정에 있어서는 그토록 한심하게 보기까지 하는 게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 시스템이 주는 목표를 달성하고, 다음 목표를 찾고, 그 목표를 위해 다시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반복하고. 목표가 다 떨어지면 막연하게 '다른 사람보다 더 높은 위치'를 목표로 삼으며 계속해서 현재를 갈아 넣는 그런 게임들.


그렇게 찰나의 성취감들에 중독되어 계속 고통을 감수하는 중독자와 같은 고통스러운 삶은 '당연히 그런 걸 바랄 리가 없잖아'라 생각할 수밖에 없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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